미중 충돌 격화로 글로벌 금융시장이 요동치는 가운데 원화가 또 다시 글로벌 투자자들의 ‘현금지급기’(ATM)로 전락하고 있다. 시장이 불안할 때마다 상대적으로 자본유출입이 자유로운 한국에서 돈을 빼가는 행태가 반복되면서 원화 가치가 다른 신흥국보다 크게 하락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 경기 둔화와 경상수지 흑자 축소 기조가 유지될 경우 장기 투자자들마저 원화에 등을 돌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2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달 1일부터 이달 10일까지 달러에 대한 원화 가치는 3.82% 하락했다. 어느 정도의 경제규모가 있는 신흥국 통화 가운데서는 터키 리라(10.13%)와 아르헨티나 페소(4.31%)에 이어 세번째로 가치 하락 폭이 컸다. 우리와 경제구조가 유사한 대만을 비롯해 말레지아, 인도네시아, 인도, 브라질, 태국 통화는 글로벌 자금의 안전자산 선호 현상으로 가치가 하락했지만 원화보다는 그 폭이 적었다. 미국과의 무역분쟁 당사국인 중국 위안화도 약세를 보이긴 했지만 달러화 대비 하락률이 1.0% 수준에 머물렀다. 필리핀과 멕시코 통화는 이 기간 오히려 달러 대비 강세를 보였다. 터키와 아르헨티나가 미국과의 마찰 및 초인플레이션이라는 최악의 상황에 빠져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신흥국 통화 중에서는 원화가치가 가장 크게 하락한 것이다. 시장에서는 미중 충돌이 지속될 경우 단기적으로는 1,200원대 돌파 가능성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조영무 LG 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은 중국에 대한 수출의존도가 높아 상대적으로 미중 분쟁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외국인투자자가 판단한 것”이라며 “따라서 단기적으로는 미중 무역협상이 원달러의 향방을 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환율 급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외환당국 관계자는 “최근 원화 가치 하락 속도가 빠른 것은 부담”이라고 말했다. 다만 직접적인 시장개입은 자제하는 분위기다. 미중 충돌이 글로벌 자금흐름을 결정짓는 상황에서 시장 개입의 효과가 크지 않은데다 국가 부도 위험을 나타내는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이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등 외국인 투자자들의 한국에 대한 신뢰도는 여전하다는 판단에서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원화 가치 하락을 용인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원화가치 하락이 대규모 자본유출로 이어지지만 않는다면 수출에는 호재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민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당장은 미중 충돌이 원화값을 결정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성장률과 경상수지 흑자 유지 여부 등이 중요하다”며 “현재와 같은 경기부진이 지속되고 경상수지 적자까지 현실화되면 자본유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만큼 기초체력을 강화할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능현기자 nhkimch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