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이만난사람]"파산선고땐 아이돌보미도 못해…불합리한 제도 고칠것"

[정형식 회생법원장 인터뷰]
직업상실등 불이익 채무자회생법 '파산선고' 용어 삭제 검토
외국 비교법 연구 통해 대체적 분쟁해결수단 도입도 고려 중
간이회생 대상사건, 부채 30억원 이하로 확대도 검토 해볼만

정형식 서울회생법원장이 12일 서울 서초동 회생법원 집무실에서 기업회생 지원을 위한 금융기관과의 협업을 강조하고 있다./권욱기자

“파산선고를 받으면 아이돌보미로 일할 수 없게 돼 있습니다. 전통소싸움 주인도 될 수 없고 국민참여재판 배심원으로도 참여할 수 없죠. 여행업 등록도 불가능합니다. 경찰과 교사 등 공무원들도 직업을 상실하게 됩니다. 채무자회생법에서 파산선고 시 개인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보장하고 있지만 여전히 개별 취업규칙 등에 남아 있는 규정들 때문입니다. 약 200개의 법령 등에 흩어져 있는 것들을 일일이 개정하기는 어려우니 채무자회생법에서 ‘파산선고’라는 용어를 삭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올해 2월 새로 부임한 정형식(사진) 서울회생법원장은 서울 서초동 회생법원 집무실에서 본지와 만나 “회생·파산 과정에서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돼온 ‘개인의 파산선고 불이익’을 개선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입법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2006년 신설된 ‘채무자 회생·파산에 관한 법률’ 제32조의2는 ‘누구든지 이 법에 따른 회생·파산 절차 또는 개인회생 절차 중에 있다는 이유로 정당한 사유 없이 취업제한 또는 해고 등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현실은 다르다. 현재 공무원·교원·변호사·회계사·법무사 등이 파산선고를 받으면 결격사유에 해당돼 직업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일반직·별정직 공무원만 파산선고 이후 면책허가가 날 경우 예외적으로 직업을 유지할 수 있다. /대담=한영일 사회부장 hanul@sedaily.com

정 법원장은 “파산선고를 받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처럼 오해하는 분들이 많다”며 “파산선고를 받은 것만으로 직업을 잃는 경우가 많아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겨났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과거에 파산을 하면 ‘돈을 못 갚은 나쁜 사람’이라고 규정짓는 분위기가 있었다”며 “시대가 달라지고 채무자회생법에서 이러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파산자라고 하면 사회생활 불능자로 만드는 수많은 법령이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파산선고 후 면책 결정이 나면 복권되지만 면책이 결정되지 않을 경우 개인은 재기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다. 정 법원장은 “이에 대해 부당함을 느끼는 일부 공무원들과 의사·간호사 등의 이해당사자들은 법 개정을 주장해 취업 불이익 조항을 없앴지만 법에 관심이 없거나 적극적이지 못한 사람들은 불이익에 노출돼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파산선고 불이익 규정을 적용받는 사람들은 최장 10년까지 일을 못 하게 되면서 파산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고 지적했다.

회생법원은 지난달 초 법무부 상사법무과와 파산선고 불이익 관련 개정을 위한 업무협의를 시작했다. 200여개에 흩어져 있는 개별 규정을 모두 개정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채무자회생법에서 ‘파산선고’ 표현을 삭제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정 법원장은 “채무자회생법 내에 명시된 ‘파산선고’ 용어를 ‘파산개시결정’으로 변경할 뿐 아니라 이원화된 파산 절차와 면책 절차를 일원화하고 복권에 관한 규정을 삭제하는 방법 등을 검토하고 있다”며 “그 이후에 세부 법령들을 찾아내 개정하면 가장 빠르고 쉽게 개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법인의 회생·파산과 관련해 정 법원장은 유관 금융기관과의 협업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 기본적으로 법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채무자회생법에 명시된 절차에 따라 진행하는 것이지만 법을 넘어서는 다양한 상황에서 외부기관들과 회생법원이 머리를 맞대면 좀 더 많은 기업을 살릴 수 있다는 의미다.

정 법원장은 “캠코나 중소기업진흥공단·신용보증기금 등 중소기업 신용 관련 협조를 해줄 수 있는 기관들과 법원이 유기적으로 생각을 공유하면 기업 컨설팅이 한결 쉬워지는 것”이라며 “외부기관들과 업무협의체를 꾸려 정기적인 미팅을 진행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이미 이들 기관 내 담당자들과 법원 내 담당자로 구성된 업무협의체는 마련됐다. 지난해 정 법원장은 회생법원 수석부장판사 등과 함께 캠코 측과 세 차례 만났으며 올해 4월에도 만나 기업회생 논의를 진행했다. 2017년 기업과 개인의 회생·파산 사건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서울회생법원이 개원한 지 2년이 흘렀다. 외부기관들도 회생법원이라는 독립 법원이 만들어진 후 협업 의욕이 커졌다. 기관의 운영이나 전문성 증대에 서로 도움이 되는 만큼 성과를 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뜻이다.

최저임금 인상과 주52시간근무제 등의 정책이 시행되면서 이를 버틸 수 있는 체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기업들은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법인 파산의 증가가 경기상황이 반영된 결과냐는 질문에 정 법원장은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다고 답했다. 그는 “지난해 법인 회생이 389건, 파산이 404건이었다”며 “지금 경제가 어렵다고 해서 올해 사건이 늘어나지는 않지만 요새 경기가 안 좋은 만큼 후행지표로서 법인 파산 건수가 늘어나는지 유심히 보고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정 법원장은 회생·파산 신청을 하는 법인들을 산업과 규모에 따라 분류해 데이터를 축적할 계획도 밝혔다. 현재 회생법원은 어떤 법인이 도산 절차에 들어오는지 분석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법원으로서는 기업 데이터가 필요하지 않아 그동안 분석하지 않았다”며 “회생법원이 이제 정식으로 출범했고 해당 자료들은 국가적으로 정책 결정 시 필요한 부분으로 보이기 때문에 올해 안에 정리해 데이터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회생법원은 통합도산법이 시행된 후 경영자의 경영권을 유지하도록 보장하면서 관리인을 선임해 기업을 살리는 역할 등을 하며 경제 선순환을 돕고 있다. 특히 중소기업 전용 회생 절차인 ‘S트랙’의 성과가 크다. 지난해 1월부터 실시된 이 제도는 △회생 신청 전 상담 △회생 신청 시 대리인단 지원 △채권금융기관과의 협상 조력 △회생 절차 종결 후 신규 대출 활성화 등으로 구성돼 기업들의 상담 요청이 많다.

정 법원장은 “중진공에서 시행하고 있는 회생 컨설팅은 진로 제시 상담을 포함해 현재 총 46건이 처리됐으며 캠코에서 시행하는 자산매각 후 임대(sale&lease back)도 5건이 완료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중진공의 ‘인가 후 구조개선 전용자금’ 대출도 11건 성사돼 업계에서 정책의 인지도가 높아지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기업의 회생지원은 암을 진단받은 환자의 환부를 초기에 도려내 살아나게 하는 것으로 비유했다. 그는 “일반적으로 법정관리에 들어갔다고 하면 해당 기업이 죽었다는 이미지를 떠올리는데 죽는 게 아니고 적기에 치료를 받아 살아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형식 서울회생법원장./권욱기자

당사자들이 자율적으로 협의할 수 있도록 돕는 자율조정프로그램(ARS)의 필요성도 언급했다. 정 법원장은 “자율조정프로그램은 회생 절차 개시 결정을 바로 하지 않고 최대 3개월까지 당사자들이 협의할 수 있는 시간을 주면서 기다려주는 것”이라며 “지난해 8월부터 시행돼 현재 4건 정도 진행했으나 협의가 이뤄져 회생 절차를 빠져나가게 된 사례는 아직 없다”고 아쉬워했다.

ARS의 성패는 채권자와 채무자의 사적 구조조정 합의에 달렸기 때문에 법원이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이 그리 크지 않다. 정 법원장은 “채권자와 채무자가 서로 양보해 합의가 이뤄져야 하는데 아직은 시행 초기다 보니 원만한 합의를 이루지 못하는 실정”이라며 “또 회생기업들의 주요 채권자들이 금융기관들인데 아직 ARS 제도에 대한 시스템(내부 규정 등)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결과적으로 채권 은행 등이 수동적으로 참여하게 되므로 금융당국에서 해당 제도를 정비하고 적극적으로 이용하도록 독려할 필요성이 있다는 게 정 법원장의 설명이다. 아울러 회생을 신청한 회사가 ARS 제도를 실질적으로 활용하도록 하려면 금융기관이 추가 담보 제공을 요청하거나 일부 상환 요구 등을 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고도 언급했다.

이어 정 법원장은 ARS에 포함되는 ADR(화해·조정 등 대체적 분쟁해결 수단)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외국과의 비교법적 연구를 통해 ADR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며 “민사 절차와 마찬가지로 도산 절차에서도 당사자들 간의 합의로 채무 재조정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프랑스의 경우 화해 절차(Conciliation), 영국과 일본도 많은 도산 사건이 채무자의 사적 합의를 통해 해결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간이회생 절차가 도입된 지 4년이 됐지만 일반회생 절차와 큰 차이가 없어 효용이 떨어진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조사보고서의 간이화 검토 △간이회생 절차 대상 사건 확대 등의 대안을 내놓았다. 정 법원장은 “간이회생 절차를 도입한 후 회생 사건 신청의 뚜렷한 증가가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채무자가 납부해야 하는 예납금 부담이 줄어들면서 신청 후 취하 사건 수는 현저하게 감소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간이회생 절차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채무자에게는 절차를 계속할 수 있는 유인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간이회생 절차는 일반회생 절차에 비해 가결 요건이 까다롭지 않아 신속하게 진행되고 조기 종결도 빠른 편이다. 간이회생은 회생채권자조에서 의결권 총액의 2분의1을 초과하는 의결권을 가진 자의 동의 및 의결권자 과반수의 동의로 가결된다. 의결권 총액의 3분의2 이상에 해당하는 의결권자의 동의가 가결 요건인 일반회생 절차에 비해 요건이 완화된 셈이다.

정 법원장은 “제도 활성화를 위해 조사보고서의 간이화를 검토할 수 있다”면서도 “조사보고서의 간이화가 날림화나 간략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조사위원들이 핵심적인 부분에 대해 정확히 조사하되 보고서 작성의 부담을 덜 수 있는 방안으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 “대통령령을 개정해야 하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현행법상으로는 부채 50억원 이하인 채무자가 간이회생 사건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만큼 이를 부채 30억원으로 개정해 간이회생 대상 사건을 확대하는 것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정리=백주연기자 nice89@sedaily.com 사진=권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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