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명 "'주말의 명화' 보며 동경했던 영화...메시지에 재미 더한 색깔 지킬것"

[CEO&STORY] 심재명 명필름 대표
출판사에서 근무하다 충무로 입문
영화사 직원 거쳐 1995년에 독립
24년 동안 40편 장편영화 만들어
'JSA' '해피엔드' '조용한 가족' 등
참신한 기획으로 韓영화 지평 넓혀
2015년부터는 '명필름 랩' 설립
연출·각본 등 후진양성에도 힘써


심재명(56·사진) 명필름 대표는 25년 가까이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영화 제작자다. 1990년대 중반 충무로에 첫발을 디딘 제작자 가운데 지금까지 해마다 일정한 편수의 작품을 선보이며 꾸준히 관객과 소통하는 제작자는 심 대표가 유일하다. 그는 남편인 이은 공동대표와 함께 지난 1995년 명필름을 설립하고 24년 동안 40편의 장편영화를 제작했다.

끈질긴 생명력보다 놀라운 것은 작품의 면면이다. ‘공동경비구역 JSA’ ‘조용한 가족’ ‘해피엔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아이 캔 스피크’ 등 도전적이고 용감한 기획으로 한국 영화의 지평을 넓힌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최근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명필름 아트센터에서 만난 심 대표는 “어떤 영화를 만들든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지면서도 대중적인 재미를 잃지 않는 명필름의 색깔을 꾸준히 지켜나갈 것”이라며 “앞으로도 오랫동안 명필름의 이름과 브랜드로 관객의 가슴에 남을 만한 작품을 만드는 것이 유일한 목표이자 꿈”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여전히 관객의 지지에 목말라하고 영화 한 편의 성적에 일희일비하는 심 대표지만 1982년 동덕여대 국문과에 진학할 당시만 해도 그는 평생 영화 일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어린 시절 TV에서 하는 ‘주말의 명화’를 챙겨보기도 하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좋은 작품을 보고 나면 혼자 감상문을 끼적일 만큼 영화를 사랑하기는 했다”면서도 “영화를 직업으로 삼겠다는 꿈을 갖기에는 용기가 부족했다”고 돌이켰다.

1987년 대학을 졸업한 심 대표는 전공을 살려 작은 출판사에 취직했다. 4개월쯤 다녔을 무렵 우연히 한 일간지에서 당시 충무로의 메이저 영화사 중 하나였던 합동영화사가 광고 카피라이터를 뽑는다는 공고를 봤다. 출판사 일이 재미없었던 것도, 다르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대던 것도 아니었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영화 일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심 대표를 사로잡았다. 오래 고민하지 않고 지원서를 냈고 결국 자신의 운명이 미리 예비한 대로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그는 “당시만 해도 영화사에 여직원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는데 ‘여자’라서 힘든 건 별로 없었다”며 “그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행복할 따름이었다”고 회상했다.

심 대표는 합동영화사에서 2년 동안 근무한 뒤 극동스크린 기획실장을 거쳐 프리랜서 영화 마케터로 활약하며 대중의 관심사를 포착하는 재능을 마음껏 뽐냈다. ‘결혼 이야기’ ‘게임의 법칙’ ‘닥터 봉’ 등 1990년대 초중반 새로운 감각으로 무장한 기획 영화들의 상당수는 심 대표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이렇게 독립 제작자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실력을 연마한 심 대표는 1995년 명필름을 세우고 ‘영화인생 2막’을 시작했다. 인생의 반려자이자 영화 동지인 이은 공동대표, 지금은 보경사라는 이름의 영화사를 따로 차려 독립한 동생 심보경 대표와 함께였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

심 대표는 남편과 자신의 취향이 골고루 섞이고 조화를 이루면서 명필름의 작품 목록도 진화를 거듭할 수 있었다고 강조한다. 그는 “이 대표는 1980년대 독립영화 집단인 ‘장산곶매’ 출신답게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는 작품에 대한 애착이 있는 제작자”라며 “대형 마트 노동자의 현실을 그린 ‘카트’, 위안부라는 민감한 소재를 대중적인 화법으로 풀어낸 ‘아이 캔 스피크’ 등은 이 대표의 가치관과 상업 영화계에서 훈련을 받은 내 경험이 맞물리면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심 대표는 총 40편의 영화 가운데 오늘날의 명필름을 있게 한 가장 소중한 작품으로 2000년에 개봉한 ‘공동경비구역 JSA’를 꼽았다. 박찬욱 감독은 앞서 ‘달은 해가 꾸는 꿈’ ‘삼인조’ 등 두 편이 연달아 흥행에 실패하며 충무로에서 퇴출 위기에 몰렸다가 ‘공동경비구역 JSA’를 통해 흥행 감독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물론 세계적인 거장으로 우뚝 서는 발판을 마련했다. 당시 보따리장수처럼 시나리오를 싸들고 영화사를 찾은 박 감독에게 심 대표가 “판문점과 비무장지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 ‘DMZ’를 영화화하려고 하는데 각색과 연출을 맡지 않겠느냐”는 역제안을 한 일화는 지금도 널리 회자될 만큼 유명하다.

심 대표는 “박 감독이 들고온 시나리오가 상업적인 가능성은 부족해 보였지만 완성도 자체는 나무랄 데 없이 빼어났다”며 “이야기꾼의 재능을 충분히 확인한 만큼 대작 영화의 연출을 맡겨도 무리가 없겠다는 판단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스크린 숫자가 지금처럼 넉넉하지 않았던 그 시기에 600만 관객을 불러 모은 ‘공동경비구역 JSA’는 요즘으로 치면 ‘1,000만 영화’나 다름없는 작품”이라며 “남북 분단의 민족적 트라우마를 ‘웰메이드 비극’으로 풀어낸 영화로 명필름 역사에서 가장 특별한 작품”이라고 추어올렸다.

최근 들어 1년에 평균 한두 편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심 대표가 영화 제작 못지않게 신경 쓰는 부분이 후진 양성이다. 그는 2015년부터 연출·각본·제작·촬영 등 분야별로 젊은 영화학도들을 양성하는 비인가 교육기관인 ‘명필름 랩’을 운영하고 있다. 매년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발된 10명 안팎의 학생들은 6개월간 강의를 들은 후 1년 동안 장편영화 제작에 참여하게 된다. 수업료는 전혀 받지 않고 작품 제작비는 물론 학생이 원할 경우 숙식까지 무상으로 제공한다. 학생 기숙사는 영화사 사무실이 있는 명필름 아트센터에 함께 자리하고 있다.

심 대표는 “명필름이라는 회사가 한국 영화계에서 이만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선후배 영화인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관심 덕분”이라며 “명필름의 경험과 자산을 예비 영화인들에게 돌려주고 장기적으로 우리 영화계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 시작한 사업”이라고 전했다. 조재민 감독의 ‘눈발’, 이동은 감독의 ‘환절기’, 이환 감독의 ‘박화영’ 등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한 후 극장 개봉까지 성공한 이들 독립 장편영화는 모두 명필름 랩의 지원 아래 제작된 작품들이다.

현재 기획·개발 중인 4~5개의 명필름 라인업 가운데 본격적인 제작에 착수한 작품은 ‘태일이’다. 명필름과 전태일재단이 공동제작하는 이 영화는 고(故) 전태일 열사의 생애를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전 열사 50주기인 내년 개봉을 목표로 제작진은 최근 시나리오 작업을 끝내고 배우 섭외와 캐릭터·배경 디자인 작업에 돌입했다. 심 대표는 “관객 220만의 선택을 받은 애니메이션인 ‘마당을 나온 암탉’을 제작한 경험을 떠올리면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흥행 광풍에 맞서 조용한 관객몰이를 하고 있는 신작인 ‘나의 특별한 형제’ 얘기가 나오자 한껏 고무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장애인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린 이 영화는 턱없이 부족한 스크린 숫자에도 불구하고 관객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며 한국 영화의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심 대표는 “마블 영화가 세계 영화산업을 쥐락펴락하는 상황에서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나의 특별한 형제’가 100만명을 돌파한 것에 벅찬 마음을 가누기 힘들다”며 “장기 상영을 통해 관객의 사랑을 계속 받으면서 손익분기점인 140만명도 넘어서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사진=오승현기자

심재명 명필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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