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형 일자리’와 관련해 전기차 배터리 공장 부지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구미 국가산업단지 전경. /연합뉴스
‘SK를 구미로, 구미로, 구미로’ ‘구미 경제를 살려주세요. SK 사랑해요’
지난 2월 SK하이닉스의 반도체 클러스터 유치를 위해 경북 구미시 주민을 비롯해 시민단체와 경제단체 등이 도로 곳곳에 내건 현수막 문구다.
구미뿐만 아니다. 김천·충주 등 여기저기서 SK하이닉스 반도체 클러스터 유치에 혈안이 됐었다. 국가균형발전이라는 명분과 수도권 규제에 발목을 잡힐 뻔했던 국내 최대 반도체 클러스터는 다행히 경제 논리에 따라 용인으로 결정됐다.
경쟁력이 최우선인 기업 투자가 표심에 흔들리고 있다. 광주형 일자리가 이제 닻을 올리는 상황에서 벌써 제2의 광주형 일자리를 찾고 있다. 내년 총선 탓인지 지방마다 ‘○○형 일자리’라고 이름을 붙인다. 김기찬 가톨릭대 교수는 “광주형 일자리를 찬성했지만 실패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며 “광주형 일자리를 만들 때는 정부 주도로 진행했지만 수익을 내는 것은 시장의 몫”이라고 말했다.
◇기업은 돈만 내세요…난립하는 ‘○○형 일자리’=정태호 청와대 일자리수석이 “제2·제3의 광주형 일자리를 활성화해야 하며 오는 6월 내 한두 곳에서 가시적 성과가 나올 것”이라고 발언한 뒤 지방 도시들의 유치 경쟁은 재점화됐다. SK하이닉스 유치에 실패한 구미시는 “국가균형발전을 위해 구미 시민은 비수도권 시민과 함께 정부 투쟁을 선언한다”고 밝히는 등 다방면으로 압박을 가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정부와 여당이 내년 총선을 앞두고 취약지역인 구미 등에 일자리 창출 프로젝트를 진행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지방자치단체 및 정치권 등에서는 구미형 일자리 관련 업종으로 전기차 배터리를 꼽는다. 국내 4대 그룹 중 삼성·SK·LG 등은 삼성SDI·SK이노베이션·LG화학이라는 글로벌 최고 수준의 전기차 배터리 업체를 보유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전기차 배터리를 ‘차세대 반도체’로 꼽고 있으며 수년 뒤 3사 합쳐 100조원이 넘는 매출을 관련 분야에서 낼 것으로 보인다. 조선·정유화학·자동차 등의 업종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전기차 배터리만큼 팔을 비틀기 쉬운 곳도 찾기 힘들다. 업계에서는 정치 논리에 의한 전기차 배터리 공장 건설은 결국 경쟁력 상실로 이어질 것이라며 극력하게 반대하고 있지만 정부 눈치에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업계의 반대 이유는 명확하다. 전기차 배터리 연구개발(R&D), 소재 산업, 수요처인 완성차 업체와 연결돼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 기존 브라운관 공장 부지를 활용한 삼성SDI 울산 배터리 공장은 일부 R&D 인력이 상주해 있는데다 항구가 인접해 있어 미주와 유럽 등지로 수출하는 데 유리하다. SK이노베이션의 충남 서산 배터리 공장 또한 대전 기술원 및 리튬이온 전지 분리막을 생산하는 충북 증평 공장이 근처에 있고 충북 진천의 현대모비스 공장과도 가깝다. LG화학 오창 공장은 차로 30분가량 거리에 있는 대전 연구소, 오창과학산업단지와 클러스터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이들 업체의 해외 공장은 대부분 완성차 업체 근처에 자리한다.
하지만 구미에 전기차 배터리 공장이 들어설 경우 낮은 숙련도와 인재 유치의 어려움 등으로 생산성을 높이기 힘들다. 특히 구미와 현대차 울산 공장과의 거리도 100㎞ 이상 떨어져 있다. 무엇보다 구미 지역이 한때 삼성전자·LG전자·LG디스플레이 등 국내 대기업의 핵심 생산기지였다는 점에서 광주형 일자리와 같이 낮은 임금을 제공할 경우 지역 근로자의 강한 반발이 예상된다. 일각에서 이야기하는 ‘투자 촉진형’ 유인 방안도 각종 세제 및 전력비용 혜택을 앞세운 미국 등 해외와 비교해 이점이 없다. 한 전기차 배터리 업체 관계자는 “공장 인력만으로는 예상치 못한 상황 발생 시 빠른 대처가 불가능해 R&D 인력이 지근거리에 있거나 상주해야 하는데 구미 쪽은 관련 인력 수급이 쉽지 않다”며 “숙련도가 높은 기존 공장 인력의 이전 등도 필요한데 가뜩이나 인력 쟁탈전이 심한 배터리 업계로서는 구미 공장 건설 시 부담이 상당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역 맞춤형 일자리 정책 필요=전문가들은 정부가 주도하는 ‘○○형 일자리’와 같은 정책보다는 수도권 공장 허가 등을 통한 클러스터 효과 창출 및 일자리 창출 활성화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도권에 공장을 마련하지 못할 경우 어차피 해외로 나갈 업체들을 국내에 묶어둬 확보한 세수로 지방 정부 등에 교부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보조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이유에서다. 한국경제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현재와 같은 개방경제 아래서는 수도권으로의 자본 집중을 막으면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는 것을 택한다”며 “정부 정책에 따라 지방으로 공장 등을 이전한다 해도 최적의 입지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만만찮은 비용이 들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밝혔다.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 유치에 힘을 써서 지역 경제를 살리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산업연구원이 내놓은 ‘수도권 기업의 지방이전 현황 및 이전요인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중소기업들은 공장 이전이나 신규 설립 시 지가, 임대료 수준, 토지 확보 용이성과 같은 토지 부문을 67.9점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판매처 접근성 및 대기업 유무가 65점을 기록했으며 원부자재 조달처와의 접근성이 64.6점을 기록했다. 현재 대기업에 토지 지원 등의 당근책을 내걸며 일자리 및 지방세 확보에 나서고 있는 지방 정부 입장에서는 중소기업으로 눈을 돌릴 경우 일자리 창출이 훨씬 수월할 수 있는 셈이다.
/양철민기자 chopi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