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9년 5월27일, 영국 의회가 ‘인신보호령(Habeas Corpus Act)’을 표결로 통과시켰다. 골자는 ‘법률에 근거하지 않고는 신체를 구속받거나 구금당하지 않는다’는 것. 오늘날 영장실질심사나 구속적부심제의 법률적·역사적 뿌리인 이 법은 더 긴 연혁을 갖고 있다. 귀족들에게 둘러싸인 존 왕이 1215년 러니미드의 숲에서 서명한 대헌장(마그나카르타·63개 조문) 39조의 내용도 비슷하다. ‘법에 의하지 않고는 자유인을 체포나 감금, 점유침탈, 이익박탈, 추방할 수 없다. 법률 외 어떤 방법으로도 자유가 침해되지 않으며 국왕도 개입할 수 없다.’
국왕 찰스 2세는 자신의 권력이 제한받을 수도 있는 이 법에 왜 동의했을까. 무엇보다 귀족과 지주들의 관습법 준수 요구가 강했다. 대헌장은 물론 권리청원(1628년)에도 ‘자유민을 합당한 이유 없이 구속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담았으니까. 찰스 2세의 부친인 찰스 1세는 권리청원에 서명하고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내전 끝에 참수당하는 운명을 맞았다. 법 통과에는 현실적 타협도 있었다. 당시 최대의 논란거리는 배척법. 영국 국교도만 왕위를 계승할 뿐 가톨릭은 배제해야 한다는 법안을 놓고 진영이 갈렸다.
배척법이 통과되면 왕의 동생인 제임스 등이 가톨릭교도라는 이유로 즉위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국교도가 대부분인 배척파는 개혁법의 하나로 인신보호령을 던졌다. 국왕파는 팔을 내주고 몸통을 지킨다는 심산에서 어차피 완전히 새로운 것도 아닌 인신보호령에 찬성표를 던졌다. 제적의원이 102명인데 셈을 잘못해 ‘유효투표 112표에서 찬성 57표, 반대 52표’라는 결과가 나왔다는 주장도 있지만 마침 의회를 방문한 찰스 2세가 즉석에서 동의해 법은 바로 효력을 가졌다. 대립과 타협 속에 영국 양당 정치의 싹이 텄다. 배척파와 국왕파는 각각 휘그당과 토리당이라는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배척파를 이끌던 섀프츠베리 백작은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부수적으로 얻은 인신보호령만큼은 각국으로 퍼져나가며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자리 잡았다. 섀프츠베리 백작의 비서였던 존 로크는 ‘정부론’에서 자유민의 권리에 ‘신성불가침한 사유재산권’을 더 붙였다. 미국 수정헌법에는 이런 정신이 녹아 있다. 영국 자신도 변방에서 제국으로 커졌다. 경제사가 윌리엄 번스타인은 역저 ‘부의 탄생’에서 법치와 사유재산권의 확립을 국부의 요인으로 꼽았다. 한국에서는 어떨까. 자유와 억압이 둔갑을 거듭하는 세태를 보자니 어지럽다.
/권홍우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