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뉴욕에서 백남준의 인물 및 공연 사진을 찍은 작가 임영균. 윗줄 맨 오른쪽 작품은 TV모니터를 쓴 백남준을 촬영한 것으로 1984년 1월 1일자 뉴욕타임즈에도 사용됐다.
“사진(寫眞)이라는 것은 진짜를 베끼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가짜가 된다. 예술사진이란 사진이 사진이란 허상에서 벗어나 사위(寫僞)에 접근하려는 정신적 의도이다. 지금 컴퓨터를 이용한 인공사진이 차차 발달하고 있다. 사진술은 더욱 철저해져서 진리가 숫제 안 보이게 된다. 역설이다. ‘가면(假面)의 진리’(오스카 와일드). 이 컴퓨터를 이용한 사진을 그냥 CD롬에 넣으면 그대로 비디오 아트가 되어버린다.”
백남준은 1993년 8월 사진작가 임영균(64·사진)이 첫 인물사진집을 출판한다고 소식을 전해오자 이 같은 글을 적어 보냈다. 한자와 한글을 뒤섞어 쓴 짤막한 글에 백남준은 사진과 허상 그리고 비디오아트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담았고 후배에게 조언하는 상냥함도 얹었다.
임영균의 사진전 ‘백남준, 지금 여기’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이길이구갤러리에서 최근 열렸다. 1980년대 백남준의 뉴욕시절 활동상을 사진으로 보여줬다. 오는 10월 17일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에서 개막하는 대규모 백남준 회고전을 앞두고 국내외에서 백남준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한 가운데 열린 전시라 눈길을 끌었다.
대구에서 태어난 임영균은 1980년대 뉴욕에서 유학했다. 인물 사진가 알렉스 카이즈의 스튜디오에서 일하던 그는 카이즈가 찍은 작가들 중 유일한 동양인인 백남준의 사진에 주목했다. 임 작가는 “여러 작가들 중 백남준의 인물사진만 유독 어두워서 그것이 동양인에 대한 편견인가 싶기도 했다”면서 “그 일을 계기로 백남준의 연락처를 알아내 전화를 했더니 ‘독일 간다’ 하시며 가을에 연락하라 했고, 또 전화하니 ‘내년 봄에 연락하라’고 하여 해를 넘긴 1992년 휘트니미술관에서의 퍼포먼스에 초대받아 처음 만났다”고 말했다. 이때 촬영된 것이 백남준과 첼리스트 샬롯 무어만과의 공연 장면이다.
특히 백남준이 ‘살아있는 조각’이자 ‘인간 첼로’를 자처해 벌거벗은 등을 보이며 무어만의 품에 안긴 사진은 두고두고 인용됐다. 무어만은 백남준의 등 위로 첼로 줄을 걸쳐놓고 연주하듯 현을 당겼고 백남준은 끼익끼익 거리는 불협화음의 전자소리를 관객에게 들려줬다.
임영균이 백남준의 작업실로 불려간 것은 1983년 초여름의 일이다. 임 작가는 “사진은 찍는 것보다 ‘찍기 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몇날 몇일 어떻게 찍을까 고민했다”면서 “백남준 선생이 다행히 나를 신뢰했고 비디오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을 생각해 ‘모니터를 한 번 써보시라’고 한 말을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회상했다. 백남준이 텔레비전 케이스를 안고 모니터에서 얼굴을 내민, 그 유명한 사진은 이렇게 탄생했다. 임영균의 이 사진은 ‘굿모닝 미스터오웰’을 소개하는 뉴욕타임즈 1984년 1월 1일자 소개기사에 쓰였고 ‘바이바이 키플링’ 등 백남준의 위성예술쇼 포스터에도 사용됐으며 2006년 백남준의 부고 기사에도 인용됐다.
사진작가 임영균이 1983년 자신이 찍은 백남준의 초상사진 앞에 섰다.
이번 전시를 위해 임 작가는 백남준과의 추억을 다시금 불러냈고, 백운아 이길이구갤러리 대표는 국내외 컬렉터들을 수소문해 백남준의 희귀작들을 끄집어 냈다. 전시작 중 1982년 휘트니미술관에 선보인 ‘TV부처’는 CCTV 카메라 앞에 앉아 모니터 속 자신을 바라보는 신라불상이 도난 당하는 바람에 다시는 볼 수 없는 작품이 됐다. 1986년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행사에서 미국에 대한 공헌이 큰 10명의 예술가 중 하나로 선정된 백남준이 메달을 목에 걸고 환하게 웃는 사진은 뿌듯한 자부심을 전한다. 배우 안소니 퀸, 가수 폴 엔카 등이 당시 백남준과 함께 상을 받았다.
임 작가는 백남준과의 인연을 뒤로하고 귀국해 전시기획자로도 일하고 중앙대에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임 작가는 198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김영삼 대통령 등의 인물사진으로 유명하다. 예술가만 200명 이상을 촬영해 ‘작가들의 작가’이기도 하다.
동시에 고즈넉하고 단아한 명상적 풍경사진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대표작 ‘해남1999’는 지난해 사진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코닥 박물관 ‘사진의 역사’에 전시됐다. 오는 11월에는 세계적 사진축제인 ‘파리포토’ 기간에 맞춰 이탈리아 로마에서도 전시가 예정돼 있다.
/글·사진=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