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알스톰사(社) 중역을 지낸 프레더릭 피에루치가 미국 법무부와 벌인 5년간의 법정투쟁을 기록한 책 ‘미국 함정’ 중문판.
‘미국이 비(非) 경제적 방법으로 다른 나라의 선두기업을 어찌 무너뜨리는지 그 놀라운 내막을 폭로한다’
힘 있는 한 줄의 홍보 문구가 중국인들의 애국심을 자극한 탓일까. ‘프랑스판 화웨이’ 사건의 내막을 담은 책 ‘미국 함정(The American Trap)’이 중국 온라인 대표 쇼핑몰인 징동닷컴 경영 서적 부문 1위를 차지하는 등 대륙의 서점가를 휩쓸고 있다.
이 책은 프랑스 알스톰사(社)에서 중역을 지낸 프레더릭 피에루치가 지난 5년간 미국 사법부와 벌인 투쟁의 과정을 소상히 담은 결과물이다. 올해 1월 출간 후 지난달 중문판이 나오자마자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알스톰은 프랑스에 본사를 둔 글로벌 전력에너지 및 고속철도 업체였다. 전력사업 부문이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에 매각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피에루치는 이 회사에서 전력부문의 최고경영자(CEO)로 일했다. 미국과의 길고 긴 투쟁의 시작은 지난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피에루치는 인도네시아와 거래를 하던 중 인도네시아 당국에 거액의 뇌물을 제공했다는 혐의로 미국 ‘반(反) 해외부패법’에 근거해 2013년 4월 미국 공항에서 체포됐다. 미국 밖(extraterritorial)에서 벌어진 사건에 미국이 국내법을 적용해 프랑스 국적의 프레더릭 씨를 체포한 것이다.
미국의 ‘반 부패법’은 미국 국내법을 어기지 않더라도 거래에 달러를 사용하거나 미국에 서버가 있는 이메일을 이용할 경우 피의자를 구속할 수 있다. 재판 결과 미국 법원은 피에루치에게 뇌물죄를 인정했고, 그는 2년여간 감옥생활을 거쳐 3년간 가석방 상태에서 경찰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알스톰은 7억 7,200만 달러(약 9,100억원)에 달하는 벌금을 냈다. 이 사건 이후 알스톰은 GE에 에너지사업 부문을 떼 주는(매각) 아픔을 맛보기도 했다.
피에루치는 자신의 지난날을 회고하며 “미국은 자국의 법률을 ‘경제전쟁’의 무기로 삼아 경쟁 상대를 약화 시키고, 결국에는 상대 기업을 헐값에 인수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미국은 각국의 이동통신·정유 화학 등 전략적 가치가 있는 기업을 타깃으로 삼아 ‘반 부패법’을 근거로 자국의 손아귀에 넣는다”고 덧붙였다. 미국 사법당국이 자신을 체포한 것 역시 자국의 기업 GE를 도우려는 의도였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프랑스 알스톰사(社) 중역을 지낸 프레더릭 피에루치. /SCMP캡처
그는 ‘알스톰’ 다음의 공격 대상이 ‘화웨이’라 가감 없이 말한다. 그는 “미국이 현재 화웨이에 취하고 있는 전략이 과거 알스톰에 했던 것과 매우 유사하다”며 “화웨이가 표적이 된 것은 화웨이의 5G(차세대이동통신)가 미국에 위협적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캐나다 사법당국에 부탁해 멍완저우 화웨이 부회장을 (대이란 제재법 위반혐의로 캐나다에서) 체포한 것 역시 자신의 사례와 완벽하게 일치한다”며 “미국은 화웨이의 굴기를 저지하기 위해 이같은 전략을 폈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해서는 유럽과 중국이 단결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약한 모습을 보이면 미국은 더욱 약자를 괴롭힌다”며 “중국 당국이 미국 기업에 벌금을 물리는 등 더욱 강하게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피에루치의 ‘미국 함정’이 최근 런정페이 화웨이 회장의 사무실 책상 위에 놓여져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런정페이 회장은 물론 화웨이 전 직원이 모두 이 책을 열독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중국 정부 고위 관리도 노골적으로 알스톰사와 화웨이 사례를 같은 선상에 놓고 미국의 부당성을 방증하는 소재로 삼고 있다. 루캉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 23일 정례 브리핑에서 ‘미국의 정치적 압박을 받아 일부 외국기업이 화웨이에 부품 공급을 중단하고 있다’는 소식에 대한 논평 요구에 “대다수 국가는 프랑스 알스톰사의 교훈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미국 정부가 국가 역량을 동원해 타국 기업을 탄압하는 행위 등에 대해 늘 고도로 경계하고 있다”고 답했다.
반격의 서막이 오른 것일까. 중국 서점가를 휩쓸고 있는 한 서적의 선풍적 인기가 허투루 읽히지 않는다. /김민정기자 jeo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