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뒷담화] '기생충' 봉준호가 20년째 제일 잘 나가는 이유

봉준호·박찬욱·김지운·류승완·최동훈 등
2000년 전후 데뷔해 모험적인 상상력으로
대중성·예술성 아우르는 충무로 부흥 주도
대형 배급사 영화계 장악하며 신인육성 소홀
'상업성' 요구에 관습적 흥행코드만 나열
개성파 젊은 감독 설 자리 잃고 관객도 외면
근본적 시스템 혁신으로 활력 불어 넣어야

영화 ‘기생충’의 해외 포스터.

봉준호 감독.

박찬욱 감독.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으로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맞은 봉준호 감독은 지난 2000년 ‘플란다스의 개’로 데뷔했습니다. 이 영화는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희귀하고 독특한 재능의 출현을 알린 작품이었습니다. 국내외 영화제에서 수많은 상을 휩쓸기도 했고요. 그리고 3년이 흘러 봉준호는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인 ‘살인의 추억’을 발표합니다. 미제 연쇄 살인사건을 부조리한 시대의 공기 안에서 묘사한 이 작품은 5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도 성공했습니다. 2000년대 초반, 이미 봉준호는 충무로 최고의 감독 중 하나였습니다.

봉준호처럼 한국영화 산업이 급성장하던 2000년 전후에 데뷔했거나 막 이름을 알린 감독으로는 박찬욱·김지운·류승완·최동훈·이창동·허진호 등이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충무로 감독의 평균 수명이 매우 짧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들 젊은 연출자가 아무리 훌륭한 작품을 내놓았어도 얼마나 오래 시장에서 버틸 수 있을지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습니다. 37세에 ‘공동경비구역 JSA(2000년)’로 대박을 터뜨린 박찬욱조차 “임권택 감독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연출가는 충무로에서 50세도 되기 전에 퇴출당한다”며 “영화가 큰 성공을 거뒀지만 앞으로 몇 작품이나 더 찍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불안감을 토로할 정도였으니까요.

20년이 흐른 지금 신기하게도 이들은 어떤 젊은 감독들보다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2000년대 전후 빛나는 가능성을 내비쳤던 이들은 이제 한국영화의 당당한 주류로 성장해 ‘K-무비’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습니다. 어느덧 50~60대에 이른 주류 감독들이 ‘거장’ 칭호를 받으며 여전히 식지 않은 열정으로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 데 반해 가장 싱싱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뽐내야 할 30~40대 감독의 존재감은 선배들과 비교해 한참 떨어집니다. 20년 만에 갑자기 감독들의 평균 수명은 늘어난 반면 ‘젊은 피’들이 잘 보이지 않는 원인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한국영화계의 산업 풍토는 2000년대 초중반 이후 급격히 바뀌었습니다. 충무로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제작사는 강남과 경기도 파주 등지로 흩어졌습니다. 대신 CJ·롯데·쇼박스·NEW 등 대형 투자·배급사들이 영화계를 장악했습니다. 특히 CJ와 롯데는 전국을 아우르는 극장 체인까지 갖추고 ‘제작-투자·배급-상영’으로 이어지는 수직계열화를 완성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투자·배급사의 영향력이 점점 확대되면서 콘텐츠를 직접 생산하는 창작자의 입김이 축소됐다는 사실입니다. 문화 상품과 무관한 여타 분야의 대기업 선진 시스템을 그대로 도입한 이들 회사는 검증되지 않은 신인급 감독 작품의 투자·배급을 맡을 경우 ‘위험성’은 줄이고 ‘상업성’은 높이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시나리오 수정을 요구한 다음에야 제작에 착수하는 공정 체계를 확립했습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형 투자·배급사 관계자는 “회사 직원들이 관객의 성향을 면밀하게 분석한 데이터를 참조하면서 각자 시나리오를 읽고 의견을 내는 과정을 반복한다”며 “결국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영화를 만들어 수익을 내는 가능성을 높이는 절차”라고 설명합니다. 김영진 명지대 영화·뮤지컬학부 교수는 “뭔가 낯설고 뾰족하게 모가 나 있는 듯한 대목은 다수 대중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방향으로 깎여버리는 경우가 대다수”라며 “약 20년 전 만들어진 신인 감독의 데뷔작인 ‘조용한 가족’이나 ‘지구를 지켜라!’ 같은 영화가 과연 지금의 한국영화계 풍토 안에서라면 제작될 수 있었을지 의문”이라고 지적합니다.

물론 투자·배급사가 작품 개발 단계부터 깊숙이 개입하는 일 자체를 비판하기는 힘듭니다. 영화는 골방에 홀로 틀어박혀 만드는 예술 장르가 아니며 문학·미술·전시 등과는 비교하기 힘들 만큼 거대 자본이 투입되는 산업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대중성 확보를 최우선적인 목표로 제작 시스템이 굴러가고 있음에도 한국영화계의 수익성은 신통치 않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한국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2012~2017년 4.0~18.3% 수준을 맴돌던 한국 상업영화의 평균 추정 수익률은 지난해 -17.3%로 뚝 떨어졌습니다. 영진위 관계자는 “제작 여건 개선과 인건비 상승의 영향도 있으나 관습적인 흥행 코드를 나열한 젊은 감독들의 상업영화들이 대중의 외면을 받은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꼬집습니다.

반면 한국영화계를 쥐락펴락하는 50~60대 주류 감독들은 지금도 자유로운 창작 환경 속에서 영화를 찍으며 기세를 올리고 있습니다. 박찬욱의 ‘아가씨’는 칸국제영화제 경쟁작에 초청될 만큼 독창적인 미학을 인정받음과 동시에 국내 개봉 후에도 42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도 성공했습니다. 한국영화 최초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품은 봉준호의 신작 ‘기생충’ 역시 벌써 대박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나홍진 감독.

윤종빈 감독.

상황이 이렇다 보니 50~60대 주류 감독을 위협할 만큼의 예술적 재능과 상업적 저력을 겸비한 40대 감독은 ‘범죄와의 전쟁’ ‘공작’의 윤종빈, ‘황해’ ‘곡성’의 나홍진, ‘우아한 세계’ ‘관상’의 한재림, ‘택시운전사’의 장훈 정도 외에는 많지 않은 상황이지요. ‘부산행’으로 단숨에 주목받는 젊은 감독으로 부상한 연상호는 최근작인 ‘염력’이 흥행·비평 양면에서 실패하면서 경력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류승완·최동훈은 40대 중후반이지만 데뷔 시기가 빨라 이들 감독보다 선배 세대로 분류됩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대기업 특유의 효율성 높은 선진 체계는 유지하되 제작 시스템의 개혁을 통해 젊은 감독들의 모험적인 시도가 한국영화계에 새 바람을 불어넣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입을 모읍니다. 투자자가 제작 전반을 주도하면서 감독을 기능적인 연출자 정도로만 여기는 관행 속에서는 2000년대 초중반의 창의적인 활력이 뿜어져 나오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는 것이지요. /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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