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1885년작 ‘감자를 먹는 사람들’. /암스테르담 반고흐미술관
“우리는 노력이 통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림을 팔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고갱을 봐도 알겠지만 완성한 그림을 담보로 돈을 빌릴 수조차 없으니 말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듯싶어 걱정스럽다. 다음 세대의 화가들이 좀 더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우리가 발판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보람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너무 짧고 모든 것에 용감히 맞설 만큼 강한 힘을 유지할 수 있는 날은 더욱 짧구나.” (빈센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1888년 8월.)
피카소를 허심탄회하게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인상주의 회화에 대한 지지도 절대적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빈센트 반 고흐 작품에 대한 지지는 절대적이다. 흥미로운 점은 인간 빈센트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다. 빈센트 같은 애인이나 배우자, 친구가 있으면 어떨까. 돌아오는 대답은 부정적이다. 그림이 아무리 좋더라도 그 그림을 그린 이와 함께 지내고 싶지는 않다고.
빈센트는 사후에 엄청난 명성을 얻었지만 죽기 전에는 아무것도 누리지 못했다. 빈센트는 실패했을까, 성공했을까.
흔히 빈센트는 세속적인 성공을 부정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예술적인 이상을 추구하다가 꺾여버린 존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순진한 부류는 아니었다. 친척 중에는 화가가, 삼촌 중에는 화상이 셋이나 있었다. 덕분에 빈센트는 16세 때부터 ‘낙하산’으로 화랑에서 일했는데 8년의 재직 기간을 생각하면 고객을 응대하고 미술품을 판매하는 일을 싫어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미술 시장 한복판에 있었으니 미술품이 유통되고 판매되는 메커니즘을 잘 알았다. 뒷날 자신이 작품을 생산하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시장의 생리를 분명하게 의식했다.
그의 동생 테오는 돈을 대고 ‘영혼의 반려자’ 노릇만 했던 게 아니라 형이 예술가로서 성공할 것을 믿었다. 물론 이 대목은 다소 모호하다. 형이 안쓰러워서 조금씩 돕다가 이른바 ‘매몰비용’ 때문에 ‘손절’한 것일 수도 있다. 빈센트가 당시 새로운 조류를 이뤘던 인상주의 안팎의 화가들과 안면을 튼 것도 동생 덕분이었다. 빈센트는 1880년대 중반에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그림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방법론을 쌓아갔다. 파리로 나와서는 인상주의와 신인상주의, 일본 판화를 접하면서 가열하게 수련했고 1888년에는 우리가 오늘날 빈센트의 것이라고 떠올리는 스타일을 확립했다. 정신병원에 입원 중이던 1889년, 그리고 세상을 떠났던 1890년에도 그의 스타일은 계속 성숙했다.
1888년작 ‘해바라기’./ 런던 내셔널갤러리
세상을 떠나기 전 수년 동안 빈센트는 1~2일에 한 점꼴로 유화를 그렸다. 한 점을 몇 년씩 붙들고 있었던 렘브란트나 앵그르 같은 화가와는 달리 공장에서 찍어내듯 작품을 생산했다. 시장에서 인정받지 못한 작품이라도 가치 있다는 이야기를 동생에게 하면서도 그 시장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작품이 상업성도 겸비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잘된 작품은 똑같이 한두 점을 더 그렸다. 그 작품을 누군가에게 주거나 팔고 난 뒤에도 자신이 간직할 수 있도록. 빈센트와 테오 형제는 상업적인 세계에서 성공할 길을 꾸준히 모색했다. 바꿔 말하면 이상과 현실을 화해시키기 위해 애썼다. 세상의 인정을 받는 순간이 올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언제인지는 모를 노릇이었다. 안 팔려도 상관없다고, 사후의 명성이 중요하다고 마음 편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빈센트가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생전에 명성을 누렸을까. 빈센트의 요절이 그의 작품을 주목하게 만드는 촉매제 구실을 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에게 헌신했던 테오가 그의 뒤를 따르듯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도 비극성을 강화했다. 테오의 아내 요한나는 남편 무덤을 빈센트의 무덤 곁으로 옮겨 형제가 나란히 잠들도록 했고 형제가 나눈 편지를 출간했다. 요한나의 입장에서는 아주버니의 그림, 그리고 남편이 아주버니와 주고받은 수백 통의 편지밖에 남은 것이 없었기에 이걸로 뭐든 만들어봐야 했다.
빈센트의 ‘성공’에는 그와 그의 동생의 이른 죽음이 전제돼야 했고 요한나의 주의 깊은 ‘프로모션’이 필요했다. 빈센트와 테오,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충분히 오래 살았더라면 빈센트, 그리고 형제의 비극은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고 빈센트의 예술을 둘러싼 ‘폭발’도 없었을 것이다.
어떤 예술가가 오늘날 알려졌고 예술품이 남아 있고 그 예술품이 사랑을 받는다면 그 예술가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문제는 파고들수록 복잡해진다. 빈센트처럼 극단적인 경우까지는 아니지만 살아서 주목받지 못하다가 사후에야 인정을 받은 예도 많고 죽은 직후에는 잊혔다가 수백 년이 지나서야 다시 발견된 예도 있다. 거꾸로 살아서는 널리 인정받았지만 죽은 뒤로는 잊히거나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예술가도 적지 않다.
당연하게도 예술가는 성공을 추구하고 세상은 예술가를 성공과 실패라는 기준으로 평가한다. 예술가가 성공을 추구하고 실패에 좌절해온 과정을 살피는 일은 거창하게 말하자면 고결한 가치와 세속적 가치 사이에서 개인이 스스로의 세계를 이루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또 인간이 추구해온 가치의 패턴을 보여준다. 언제나 그렇듯 예술을 이해하는 일은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다.
1890년작 ‘자화상’/파리 오르세미술관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겐 우리가 써버린 돈을 다시 벌 수 있는 다른 수단이 없다. 그림이 팔리지 않는 걸… 그러나 내 그림이 그동안 내가 쓴 물감값과 생활비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걸, 언젠가는 다른 사람들도 알게 될 것이다.” -(빈센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1888년 10월.)
이연식 미술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