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공군 V-1(보복 병기 1호)의 해부도./미 공군박물관
1944년 6월13일 오전4시30분 영국 런던.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도시의 여명을 찢었다. 바로 뒤 여기저기에서 폭탄이 터졌다. 독일의 신병기 V-1은 첫 공습에서 적지 않은 상흔을 남겼다. 시민 26명이 부상당하고 6명이 바로 죽었다. 가옥 12채가 전파되고 50여채가 파손됐으며 전략 수송로인 철교 하나가 피폭당했다. V-1은 많을 때는 하루 100발 이상이 런던 부근에 떨어졌다. 모두 3만여기가 제작된 가운데 영국이 9,521발을 맞았다. 전쟁 막바지 독일군은 벨기에 안트베르펜 등을 향해서도 2,448발을 쐈다.
집중적으로 두들겨 맞은 영국에서는 6,184명이 죽고 1만7,981명이 다쳤다. 놀라운 것은 영국인들의 항전 의지. 공습 첫날 새벽에 대파된 철교는 재빠른 복구 작업으로 저녁 무렵 기능을 되찾았다. 영국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V-1을 막았다. 대서양 연안의 ‘대공포 벨트’에서 탄막을 치고 전투기를 발진시키며 대형 풍선을 띄웠다. 영국에는 천만다행으로 V-1의 속도가 느렸다. 최고 시속 580㎞, 최후 개량형도 640㎞ 이내여서 전투기로 요격할 수 있었다. 영국 조종사들은 기관총탄이 떨어지면 전투기 날개로 V-1의 날개를 살짝 쳐 떨어뜨렸다.
사정거리도 250㎞ 이내로 짧고 정확도 역시 떨어졌다. 초기형은 반경 오차가 30㎞, 후기형도 17㎞에 이를 만큼 나빴다. 성가신 V-1을 상대하던 영국은 얼마 뒤 진짜 난적을 만났다. 독일 공군 소속의 V-1이 등장하고 약 3개월 뒤 친위대가 선보인 V-2 로켓은 종말 속도가 음속(마하)의 5배를 넘어 어떤 무기로도 대응이 불가능했다. V-1과 V-2의 정확도가 높았다면 영국은 자칫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할 뻔했다. 독일의 입장에서는 등장 시기를 놓쳤다. 진작에 개발을 마치고도 연합국이 노르망디에 상륙한 뒤 일주일이 지나서야 꺼내 썼다. 아돌프 히틀러의 승인이 지연된 탓이다.
전세를 되돌리지 못했어도 V-1은 뛰어난 가격 대비 성능을 보였다. 제작비가 전투기의 12분의1, 폭격기의 30분의1에 불과했다. 1940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공군이 전력을 다한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항공기 3,075대와 조종사 등 7,680명을 잃은 독일은 인명 피해 전혀 없이 영국을 괴롭혔다. 세계 각국이 V-1의 후손인 순항미사일과 V-2의 손자 격인 탄도미사일 개발 경쟁을 펼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비대칭 전력 확보 경쟁이 가장 치열한 곳이 바로 우리가 숨 쉬는 이 땅, 한반도다.
/권홍우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