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범죄인 인도 법안’이 미중 갈등의 새 도화선이 된 가운데 미국뿐 아니라 유럽을 비롯한 서구권도 홍콩 사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홍콩 정부가 고무총과 최루가스로 시위대를 강제 진압하며 유혈충돌이 격화하자 중국에 홍콩을 반환한 영국을 중심으로 ‘민주주의 사수’를 내걸며 범죄인 인도법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다. 미중 무역전쟁에서 ‘반(反)중국’ 연대 동참을 망설여온 유럽이 홍콩 사태를 언급하면서 미중 갈등이 중국과 서구권 간 대립으로 확전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홍콩 정부는 13일 전날부터 벌어진 반정부시위로 79명이 다치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발표했다. 홍콩 역사상 처음으로 경찰이 고무탄으로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부상자가 속출한 것이다. 홍콩 정부는 전날 시위의 여파로 이번주 말까지 행정청 청사를 폐쇄한 상태다.
홍콩 정부가 법안 처리 강행 입장을 고수하며 사태가 극한으로 치닫자 그동안 침묵했던 유럽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12일(현지시간) 하원에서 중국에 지난 1997년 맺은 영중 공동선언을 준수하라며 처음으로 홍콩 사태를 언급했다. 영국이 식민지였던 홍콩을 중국에 반환할 당시 중국이 약속한 일국양제(1국가 2체제) 원칙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페데리카 모게리니 EU 외교안보 고위대표도 “유럽 국가들은 범죄인 인도법에 대한 홍콩 시민들의 우려를 공유한다”며 “시위대의 권리가 존중되고 자유롭고 평화롭게 표현돼야 한다고 요구했다”고 밝혔다. 영국 식민지 출신 국가인 호주 역시 “범죄인 인도법은 높은 수준의 자치권과 권리·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 정치권은 초당파적으로 홍콩 사태를 규탄하고 있다. 민주당의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이날 성명에서 “범죄인 인도법은 지난 20년간 유지돼온 미국과 홍콩 간의 긴밀한 관계를 훼손한다”면서 의회가 일국양제 원칙에 따라 홍콩에 자치권이 충분히 보장되는지 재평가하는 입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서방 각국이 중국에서 민감해하는 홍콩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미국이 주도한 무역전쟁과 달리 이번 사태는 서방이 구축한 민주주의 가치와 직결돼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특히 홍콩에서 법안이 통과될 경우 중국 정부가 다른 중화권 국가에도 탄압을 이어갈 것이라는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전날 사설에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과의 무역전쟁으로 윤리적 지렛대를 스스로 훼손했지만 서구는 민주주의에 대해 강력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며 무역과 홍콩 독립성 문제는 별개라고 지적했다.
국제여론이 악화하는 와중에도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은 전날 밤 배포한 성명에서 “이(시위)는 노골적으로 조직된 폭동의 선동”이라며 시위대가 “방화에 날카로운 쇠막대기를 사용하고 경찰에 벽돌을 던졌으며 공공건물을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중국도 ‘내정간섭’이라며 연일 외부의 개입을 경고하고 있다. 겅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홍콩에서 벌어진 일은 조직적인 폭동”이라며 서방을 향해 중국 내정에 간섭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와 관련해 뉴욕타임스(NYT)는 “미중 간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중국 강경파 사이에서는 중국에 적대적인 외국 세력이 홍콩을 중국 본토 전복의 근거지로 삼고 있다는 우려가 심화하고 있다”며 중국이 범죄인 인도법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중국 환구시보도 펠로시 의장 등의 발언을 거론하며 “이들은 중국 대륙과 대립하는 데 홍콩을 카드로 쓰고 싶어한다”고 비판했다.
실제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홍콩 사태를 앞세워 중국이 압박하는 ‘일국양제’를 비판했다. 이날 집권여당인 민주진보당 대선후보로 사실상 결정된 그는 담화를 통해 “이번 사건이 대만인들에게 준 느낌은 일국양제는 안 된다, 특히 민주화된 대만은 일국양제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홍콩에서는 범죄인 인도 법안이 반체제인사를 중국으로 강제송환하는 데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 속에 반대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김창영기자 kcy@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