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을 받아 빛나는 나무들 너머로 백인제 가옥의 사랑채가 보인다.
백인제 가옥으로 들어가는 대문.
백인제 가옥의 사랑방 내부 모습.
영화 ‘암살’은 1933년 조선 경성과 중국 상하이를 배경으로 조선군 사령관과 친일파 암살 작전에 투입된 독립군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중심이 되는 시간적 배경은 1930년대지만 영화는 유장한 호흡의 대하소설처럼 한일병합 직후부터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를 담는다. 서사의 동력을 만드는 핵심 인물은 친일파 강인국(이경영분)의 쌍둥이 딸이다. 영화 초반 강인국의 아내이자 독립운동가인 안성심(진경분)은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두 딸과 함께 달아나다가 남편의 지령을 받고 온 집사(김의성분)에게 총살당한다. 강인국은 “아내는 죽이고 두 딸만 데려오라”는 명령을 집사한테 하달한 터였다.
집사는 쌍둥이 가운데 언니는 강인국에게 무사히 데려다 주지만 유모의 품에 안겨 달아난 동생은 미처 붙잡지 못했다. 이후 2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면 친일파 아버지 밑에서 자란 언니는 부르주아 신여성 미츠코로, 동생은 만주 일대를 휘젓는 독립군 안옥윤으로 성장해 있다. 배우 전지현이 1인 2역을 맡아 미츠코와 안옥윤을 연기했다.
서울 북촌 가회동에 있는 ‘백인제 가옥’은 일제에 몸을 바짝 낮추는 처세술로 큰 성공을 거둔 사업가인 강인국의 저택으로 나오는 곳이다. 이 장소는 강인국이 아내를 죽이라는 분부를 내리는 프롤로그를 비롯해 영화의 주요 고비마다 등장하며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 조성에 일조한다.
북촌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2,460㎡ 대지 위에 조성된 백인제 가옥은 1913년 한성은행 전무였던 한상룡이 지었다. ‘을사오적’ 이완용의 외조카이자 창씨개명에 앞장선 한상룡은 15년 동안 거주하다가 1928년 6월 한성은행에 이 집을 팔았다. 이후 언론인 최선익을 거쳐 1944년 백병원 설립자인 백인제 선생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2009년 11월 서울시를 새 주인으로 맞이한 백인제 가옥은 2015년부터 일반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널찍한 대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서면 여름의 쨍한 햇살 아래 품위와 격조로 가득한 한옥이 모습을 드러낸다. 언뜻 보면 전통 한옥과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일제 강점기에 친일파가 건립한 집인 만큼 다소 다른 건축 양식을 지니고 있다. 우선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한 보통의 한옥과 달리 두 공간을 복도로 연결해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일본식 다다미방을 두고 붉은 벽돌과 유리창을 유독 많이 사용한 것 역시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가옥 내부를 둘러보려면 서울시 공공서비스 예약 사이트에서 ‘안내원 해설 관람’ 항목을 찾아 미리 예약해야 한다. 예약을 안 해도 마당을 돌아다니며 가옥의 겉모습은 구경할 수 있으나 집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 자유 관람과 안내원 해설 관람 모두 무료이며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암살’에서 강인국은 미츠코를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경성에 온 안옥윤으로 착각하고 총으로 쏴 죽인다. 미츠코는 조선군 사령관의 아들인 일본군 대위와의 결혼을 불과 하루 앞둔 터였다. 피붙이를 잃은 대신 작전 수행의 기회를 얻은 안옥윤은 미츠코로 가장해 백인제 가옥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강인국과 함께 결혼식장으로 향한다. 웨딩드레스를 곱게 차려입고 부케 안에 권총을 숨긴 안옥윤은 항일 운동을 하다가 접고 살인 청부업자로 살아가는 ‘하와이 피스톨(하정우분)’과 미리 입을 맞추고 대대적인 결투에 나선다.
애지중지 키운 미츠코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강인국은 바짝 엎드린 채로 “(나의 친일은) 민족과 집안을 위한 것이었다. 무식한 조선놈들도 먹여 살려야 하고…”라며 궤변을 늘어놓는다. 안옥윤이 아버지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머뭇거리는 사이 하와이 피스톨이 ‘탕!’하는 총성과 함께 강인국의 숨통을 끊어놓는다.
아수라장으로 변한 결혼식장에서 겨우 빠져나온 안옥윤과 하와이 피스톨은 병원으로 피신한다. 안옥윤의 작전 수행에 힘을 보태긴 했으나 독립의 꿈을 일찌감치 접고 ‘개인주의자’로 전향한 하와이 피스톨은 이렇게 냉소한다. “조선군 사령관과 강인국을 죽인다고 독립이 되나.” 이에 안옥윤은 답한다. “모르지. 그렇지만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암살’은 달걀로 바위를 치듯, 굴러떨어지기만 하는 바윗덩어리를 밀어 올리듯 무모한 투쟁에 청춘을 바친 열사들의 숭고한 혼을 기리며 삼가 옷깃을 여미는 영화다.
/글·사진=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