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색인문학] 문명에 쫓기는 노루·노부부에서 '恨'을 보다

■사랑,죽음,그리고 미학
-김동규 한국연구원 학술간사
차량에 놀라 황급히 달아나는
아무것도 아닌 자의 뒷모습은
존재근거 박탈당한자 슬픔이자
우울사회가 내뱉는 恨의 표현
한국적인 문화의 세계화와
'자살률 1위' 우울정체 밝히려면
체질처럼 형성된 恨 이해해야

어느 해 늦가을, 모처럼 오대산 산행을 준비했다. 해가 질 무렵 산마을에 버스가 도착했다. 그날 묵을 산장까지는 한참을 더 걸어야 한다. 별들이 총총 눈을 깜박이기 시작하고, 산의 정취가 그윽하게 물들어간다. 굽이진 좁은 도로를 한가로이 걷는 중인데, 전방에 소형트럭이 헤드라이트를 밝히며 서행하고 있다. 그때 전혀 예기치 않은 광경이 펼쳐진다. 트럭 앞쪽에 노루 한 마리가 내달리고 있는 게 아닌가! 검고 긴 그림자와 노루, 그리고 트럭이 일렬종대로 나란히 산길을 달리고 있다. 살짝 길섶으로 피하든지 길 밖으로 뛰쳐나가면 될 텐데, 노루는 무작정 앞만 보며 달아난다. 피 말리는 광경에 덩달아 내 심장도 하염없이 뛰기 시작한다.

시간이 꽤 흘렀건만 둘의 쫓고 쫓기는 달리기는 계속되고, 전조등 빛이 소실점처럼 사라질 때까지도 그랬다. 무정한 트럭 운전수는 술래잡기 놀이를 즐겼던 걸까. 노루에게 조금만 감정이입을 했더라면, 차를 잠시 멈추고 전조등을 끌 수도 있었을 텐데. 한심한 노루와 비정한 인간이 연출해내는 우스꽝스럽고 구슬픈 풍경이 오대산 자락을 한층 어둡게 물들였다. 평화로워 보였던 산과 별들은 실은 저 긴박한 사건을 숨죽이며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강석인 사진작가 ‘우리들의 할머니’

과거 산행을 즐겼던 시절의 한 조각 기억이다. 때때로 무언가에 쫓기는 느낌이 들 때마다 불쑥 떠오르는 기억이기도 하다. 나는 이와 유사한 장면을 다룬 이어령 선생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우연히 펼친 그의 책 한 대목이 나의 오대산 기억과 절묘하게 어울렸다. 노루가 시골의 노부부로 바뀌지만, 펼쳐지는 상황과 그 장면이 자아내는 안타까움은 대동소이하다.


“지프차가 사태진 언덕길을 꺾어 내리막길로 접어들었을 때, 나는 그러한 모든 것을 보았던 것이다. 사건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사소한 일, 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가장 강렬한 인상을 가지고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앞에서 걸어가고 있던 사람들은 늙은 부부였다. 경적 소리에 놀란 그들은 곧 몸을 피하려고는 했지만 너무나도 놀라 경황이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은 갑자기 서로 손을 부둥켜 쥐고 뒤뚱거리며 곧장 앞으로만 뛰어 달아나는 것이다. 고무신이 벗겨지자 그것을 다시 잡으려고 뒷걸음친다. 하마터면 그때 차는 그들을 칠 뻔했던 것이다. (…) 나는 한국인을 보았다. 천 년을 그렇게 살아온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뒷모습을 만난 것이다. 쫓기는 자의 뒷모습을.”

이어령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3)’의 첫 대목이다. 20세기 중반 한국의 현실과 한국인들의 한(恨)을 탁월하게 형상화한 명장면이다. 노루와 노부부, 이들은 이 땅에 살아온 뭇 생명체들이다. 땅에 의지하며 근근이 살아온 존재들, 문명의 이기로 무장한 자들에게 하염없이 쫓기는 자들. 한이란 이처럼 이름도 힘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자들’의 공포와 당혹감을 기저에 깔고 있는 정서다. 여기 한반도 같은 문명의 주변부에서 오랫동안 형성된 정서의 틀, 차라리 노루와 같은 자연 생명체들에 친화력이 있는 저 원시의 정념, 한국인들은 그것을 ‘한’이라 불러왔다. 현대인들은 그것을 ‘멜랑콜리(melancholy)’라 바꿔 부르기도 하는데, 사실 한과 멜랑콜리를 구분하지 못해 범하는 말실수일 뿐이다.

티치아노 베첼리오 ‘베누스와 아도니스’ 1554, 캔버스에 유채, 186x207㎝.

한과 멜랑콜리는 엇비슷해 보이지만, 둘은 사뭇 다른 것이다. 멜랑콜리는 쫓기는 자들의 속절없는 뒷모습과 무관하다. 오히려 서양 인문학에서 말하는 멜랑콜리는 자연(또는 신)을 쫓는 사냥꾼의 정념에 가깝다. 그것은 이유 없이 쫓기거나 속절없이 자기 존재의 근거를 박탈당하는 이들의 슬픔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타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낭패감에 가까운 것이다. 나르키소스나 아도니스처럼 미친 듯이 사냥감을 쫓다가 사냥에 실패한 자들의 허탈감, 혹은 노루를 쫓던 트럭 운전자의 뒤틀린 심사와 유사한 것이다.

지금 이 마당에 ‘한’을 거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빛바랜 민족주의를 꺼내 들려는 게 결코 아니다. 복고풍 취향이 있어서도 아니다. 한국어를 사용해온 공동체의 역사적 문맥이 지금의 ‘우리’를 이해하는 데 긴요하기 때문이다. 체질처럼 형성된 한국적인 것을 찾아내되, 그것을 민족이라는 폐쇄적인 우리에 가두지 않고 세계와 창의적인 소통을 하는 매체로 사용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류와 방탄소년단(BTS)을 통해 확인되듯 문화 경쟁력은 한국적인 것의 세계화에 달렸다. 세종대왕의 말, 즉 ‘우리나라 말이 중국의 그것과는 달라서 글자를 가지고는 서로 통하지 않는 까닭에’라는 문제의식은 현재도 유효하다. 이 말은 보편성을 지향하지만, 특수성을 포기하지 않는 글로컬(glocal) 문화 육성 이념을 담고 있다. 이런 이념의 기저에는 다음과 같은 철학, 즉 인간에게 허락된 보편은 특수를 배제하는 게 아니라 포용할 때에만 허락된다는 철학이 깔려 있다. 보편이라는 나무는 특수라는 토양에 깊이 뿌리를 내릴수록 더 높이 자란다.

대한민국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부동의 1위며 전 세계 국가들과 비교하더라도 최정상을 다투고 있다. 과거보다 우울증 환자들이 부쩍 늘고 있다. 몹쓸 전염병처럼 우울이 창궐하는 형세다. 이런 인상은 단순한 착시가 아니다. 우리는 분명 ‘우울 사회’에, 자연으로부터 차단된 ‘자폐 도시’에 살고 있다. 이 시점에서 시급한 일은 한국인이 겪고 있는 우울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다. 이 작업은 단순히 의학적인 차원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사회학이나 심리학적인 접근은 물론, 인문학적 차원의 우울 분석이 요구된다. 예술과 철학이라는 렌즈를 통해 고해상도로 확대해 본다면, 아마도 작금의 우울은 한국적 한과 서양적 멜랑콜리 ‘사이’, 그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김 동 규 한국연구원 학술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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