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기업 브랜드를 만드는 게 내 목표다. 현대와 도요타도 하는데 왜 베트남은 못하나. 미국에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이 있는데 왜 베트남에는 없는가.”
제조·호텔·부동산·관광·유통·교육·의료 등 베트남 시장에서 손대지 않은 곳이 없다는 빈그룹의 창업자 팜녓브엉(50) 회장이 올해 2월 현지 신문 뚜오이째와 인터뷰하면서 한 말이다. 국수를 팔던 회사가 25년 만에 스마트폰까지 제조하는 현지 최대 기업으로 부상한 이력 때문에 ‘베트남의 삼성’으로 불리는 빈그룹은 최근 자동차 제조에까지 뛰어들며 세계적인 첨단 제조사의 꿈을 향해 또 한 발짝 힘차게 다가섰다.
빈그룹은 지난해 6월 말 기준 53개 계열사를 거느리는 명실상부 베트남 최대의 민영기업이다. 계열사들을 포함한 시가총액은 베트남 시총(1,385억달러)의 23%를 차지한다.
즉석 국수를 팔던 식품기업으로 출발해 스마트폰과 자동차까지 제조하는 거대 그룹으로 성장해온 빈그룹의 스토리는 제일제당에서 시작해 세계적인 제조사가 된 삼성을 떠올리게 한다.
창업자인 팜 회장은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지난 1968년 노점상인 어머니와 군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스로 “내 꿈은 소박했다. 내 가족을 부양하기만 바랐다”고 회고할 만큼 어려운 형편에서 자란 그는 수학에 천부적 재능을 지닌 덕분에 모스크바 지질탐사대학으로의 유학 기회를 얻어 경제학을 전공했다.
1993년 졸업 후 모스크바를 떠나 아내와 우크라이나 하리코프에 정착한 것은 팜 회장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놨다. 그곳에서 그는 소련 붕괴 후 굶주리는 우크라이나인들에게 값싼 즉석조리 식품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하고 테크노컴을 창업해 즉석 국수를 팔기 시작했다. 1995년 35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2대의 생산 라인까지 갖춘 그는 ‘미비나(Mivina)’라는 브랜드 이름으로 사업을 키워나갔다. 1998년에는 국수 판매가 100만봉지를 돌파했고 테크노컴은 즉석 조리용 감자, 양념 등을 30여개국에 수출하는 대형 식품사로 성장했다. 미비나 국수는 2009년 시장 점유율 98%를 차지하는 우크라이나 국민 브랜드로 우뚝 섰다.
베트남에서 빈그룹의 성장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우크라이나에서의 성공을 기반으로 베트남으로 돌아온 팜 회장은 부동산 기업 빈컴과 관광·호텔 회사 빈펄을 설립하고 2012년에는 빈컴과 빈펄을 합병해 빈그룹을 탄생시켰다. 연간 매출 1억달러를 올리는 우크라이나 테크노컴을 2010년 네슬레에 매각한 뒤였다.
빈그룹은 호찌민·하노이에 쇼핑몰 빈컴센터, 냐짱·다낭 등 휴양도시에 고급 리조트들을 조성했고 계열사 빈홈은 지난해 호찌민에 베트남 최고층 빌딩 ‘랜드마크81’을 세웠다.
팜녓브엉(오른쪽 첫번째) 빈그룹 회장이 이달 14일(현지시간) 빈패스트 하이퐁 공장에서 응우옌쑤언푹(가운데) 베트남 총리를 안내하고 있다. /하이퐁=로이터연합뉴스
빈패스트의 첫 양산차 ‘파딜’ /빈패스트 홈페이지 캡처
V스마트 시리즈 일종인 ‘액티브1+’
부동산으로 떼돈을 번 빈그룹은 오는 2028년까지 회사를 첨단 제조업 중심으로 바꾸겠다며 자동차·스마트폰 시장에 뛰어들었다. 특히 14일 계열사인 빈패스트가 베트남 최초의 완성차 양산에 돌입한 것은 베트남 제조 역사에서도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앞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을 마치고 베트남 제조사업을 상징하는 곳으로 빈패스트 공장을 일부러 둘러보기도 했다. 빈패스트의 첫 시판 모델인 소형 크로스오버 ‘파닐(Fadil)’은 17일부터 소비자에게 인도돼 도로를 누비기 시작했다. 2025년까지 연 50만대를 생산하겠다는 빈패스트는 독일 지멘스 베트남 법인과 2019년 말까지 전기버스를 출시하기로 하는 등 미래 모빌리티에도 욕심을 내고 있다.
빈그룹은 또 자회사인 빈스마트를 통해 베트남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1위인 삼성전자(지난해 2·4분기 37%)의 아성을 무너뜨리겠다는 야심도 품고 있다. 빈스마트는 지난해 12월부터 스페인 BQ와 제휴해 만든 스마트폰 ‘V스마트’ 시리즈 4종을 하이퐁 공장에서 양산하기 시작하면서 2021년까지 500만대를 판매하겠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이는 지난해 베트남에서 팔린 휴대폰 1,500만대의 33%에 달하는 규모다.
올 3·4분기에는 스마트TV를 만들고 인공지능(AI) 기반의 첨단 정보기술(IT) 생태계를 구축할 방침이다. 3월 연구개발(R&D) 계열사인 빈테크의 첫 해외 연구소를 경북 대구에 열었고 일본·이스라엘·미국 등에도 연구시설을 세우겠다는 각오다. 이러한 행보에 주목한 SK와 한화는 빈그룹에 각각 10억달러, 4억달러씩 투자했다.
다만 빈그룹이 삼성과 같은 첨단제조사가 되기까지 풀어야 할 과제도 만만치 않다. 우선 지난해 그룹 매출(52억5,000만달러) 가운데 82.7%가 부동산에서 나올 만큼 부동산 사업 의존도가 높다는 것이 문제다. 자동차·스마트기기 사업에서 수익이 나지 않는 탓에 자금줄인 부동산에서 손을 뗄 수 없는 상황이다.
이미 굴지의 글로벌 기업들이 움켜쥐고 있는 자동차와 스마트폰 시장으로 빈그룹이 비집고 들어갈 틈도 잘 보이지 않는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빈패스트가 베트남 자동차 시장에서 성공하려면 현대·도요타를 뛰어넘을 만큼 합리적인 가격과 품질을 동시에 갖춰야 하는데 정부의 세제 혜택 없이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시장분석업체 카날리스는 “빈그룹이 2021년까지 스마트폰 500만대를 판매하려면 마케팅과 브랜드에서 삼성·오포에 대항할 정도가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제 신용평가사인 피치는 자동차 사업이 부채부담을 키웠다면서 지난해 말 빈그룹의 등급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낮춘 바 있다. /김창영기자 kcy@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