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윤모(오른쪽)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1일 오후 서울 중구 무역보험공사에서 열린 수출상황 점검회의에서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권욱기자
한국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반발해 일본이 경제보복 카드를 꺼내 들었다는 현지 언론보도가 나온 6월30일. 보도를 접한 통상당국은 오전부터 긴급회의를 주재하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 일본으로부터 사전통지를 전혀 받지 못했기 때문에 진위를 파악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산업통상자원부 고위관계자는 “(일본이) 최소한의 언질이나 귀띔 없이 규제를 한다는데 지금까지 이런 사례가 있었나 싶다”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튿날인 1일 일본 경제산업성이 관련 내용을 공식화하면서 보도는 사실로 드러났다.
이를 두고 통상 전문가들은 정부의 일본과의 대화 채널이 사실상 붕괴된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내놓았다.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설사 일본이 직접적으로 통보하지 않았더라도 우리 정부가 현지에 상무관까지 파견해둔 만큼 일본 측과 직간접적으로 접촉해 관련 움직임을 포착했어야 했다”며 “상무관조차 이 같은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했다면 한일 간 대화 채널이 그만큼 붕괴됐다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수출입 규제를 시행하기에 앞서 대사관에 관련 내용을 귀띔해주는 것은 ‘최소한의 예의’로 통용된다. 형식적이라도 상대국의 의견을 수렴하는 모양새를 거쳐 양국의 관계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한 통상 전문가는 “규제를 꺼내 들기에 앞서 관련 내용을 담은 문건을 사본 형태로 보내주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조차 없었다니 믿기 어렵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최소한의 소통 창구마저 무너진 현실에 일제히 우려를 표했다.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일본과는 경제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된 탓에 중국보다 더 많은 대화 창구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들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실제 양국 정부 간 채널이 붕괴되고 있다는 신호는 곳곳에서 감지된다. 해양수산부 역시 일본과의 대화 채널이 막히면서 한일 어업협정 재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문성혁 해수부 장관은 취임하자마자 일본 농수산대신에게 서신을 보내 논의를 재개하자며 손을 내밀었지만 이전과 달리 과장급 실무회담 일정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한일 간 갈등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마다 중재에 나섰던 원로 정치인들마저 사라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외교부에서 고위직을 지냈던 한 전직 관료는 “이미 한일 갈등은 관료들이 해결할 수 있는 선을 떠났다”며 “일본의 문화를 이해하고 대화할 수 있는 원로들은 사라졌고 감정만을 앞세우는 철없는 정치인들만 남아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앞으로도 대화 채널 복원은 쉽지 않아 보인다. 실무부처 사이에서는 경제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된 일본과 대화를 재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간간이 새나오지만 양국 정권의 자존심 대결 사이에 파묻히는 모양새다. 실제 정부는 강제징용 배상 판결 논란과 관련해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원칙을 기반으로 ‘타협은 없다’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아베 정부 역시 강경 대응을 통해 “대법원 징용 판결 이후 일본의 외교협의 요청을 무시하며 굴욕을 안겼다”며 보수층 국민들의 감정을 계속해서 자극할 것으로 전망된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외교적인 문제를 왜 경제적으로 풀려고 하느냐고 일본을 비판할 수는 있다”면서도 “주한 방위군 예산을 얘기하면서 자유무역협정(FTA)과 연계하는 미국의 경우만 봐도 외교·안보 이슈와 경제를 연계하는 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 사이 실무부처 사이에서는 ‘달리 할 게 없다’는 무력감도 감지된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사견임을 전제로 “중국이 여전히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보복 등 힘의 논리를 펴는 가운데 일본과도 척을 지면 우리가 달리 기댈 곳이 없다”면서도 “양국 관계가 경색되면서 우려되는 부분이 적지 않지만 정치적인 문제가 개입돼 있는 터라 우리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토로했다.
/세종=김우보·정순구기자 ub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