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화가 알렉산더 폰 벤사의 쾨니히그레츠 전투 묘사도. 빈 전사박물관 소장.
1866년 7월3일 오전7시 오스트리아 쾨니히그레츠. 프로이센군 22만명과 오스트리아군 23만8,000명이 맞붙었다. 초반은 혼전. 양쪽의 지휘관들이 전공을 세우려 독단적으로 움직인 탓이다. 얽히고설킨 전장에서 프로이센군 지휘참모부는 빠른 판단과 명령 하달로 전장을 수습해나갔다. 반면 오스트리아군은 주력 부대에 대한 통제권을 전혀 행사하지 못했다. 오후 들면서 전세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프로이센의 완승. 오스트리아군의 전사자(5,793명, 프로이센 1,929명)와 부상자(8,514명, 프로이센 6,948명)가 훨씬 많았다. 무려 2만2,170명이 포로로 잡혔다. 잃어버린 군마도 6,000필(프로이센 940필)에 이르렀다.
전쟁은 이후 보름 더 진행됐으나 승패는 사실상 끝났다. 오늘날 체코 흐라데츠크랄로베시에서 45만명에 이르는 대병력이 격돌한 이 전투는 역사를 갈랐다. 프로이센이 독일 통일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이탈리아는 숙원이던 베네치아를 되찾았다. 전쟁 발발 요인은 전통과 신흥의 충돌. 나폴레옹이 해체(1806년)한 신성로마제국의 터줏대감이던 오스트리아는 독일연방 의장국을 맡아 대독일의 기치 아래 통일을 꾀했다. 반면 신흥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까지 포함하는 통일은 주변국의 반대로 성사되기 어렵다며 프로이센과 북부 독일 중심의 소독일주의를 내세웠다.
프로이센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전쟁 전부터 주도면밀하게 일을 꾸몄다. 프랑스의 참전 가능성을 묶고 이탈리아를 끌어들였다. 구체적인 승인은 세 가지. 첫 번째로 총연장 5,600㎞, 5개 주요 노선의 철도망으로 신속 정확하게 병력을 모았다. 간선 노선이 하나뿐이던 오스트리아는 철도의 중요성을 몰랐다. 두 번째 승인은 개인화기. 프로이센군 후장식 소총의 분당 발사 속도는 12발로 분당 5분이 고작인 오스트리아군의 전장식 소총보다 두 배 이상 빨랐다. 세 번째는 경제력. ‘호밀과 철의 결혼’으로 불리는 토지자본의 산업 자본화와 독일관세동맹(1837년)으로 북부 독일의 경제력이 남부를 앞섰다.
주목할 대목은 이 전쟁이 게르만족 간의 마지막 싸움이었다는 사실이다. 승전 직후 프로이센의 일부 장군들은 오스트리아 빈으로 쳐들어가 모든 걸 한 방에 끝내자는 주장을 펼쳤다. 프랑스와의 전쟁에 대비해 배후의 게르만을 적으로 돌리지 말자는 비스마르크의 설득이 통해 프로이센은 진격을 멈췄다. 오스트리아는 이후 모든 면에서 독일 편을 들었다. 독일 민족의 절제된 힘은 패전과 냉전에 의한 분단마저 넘었다. 부럽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