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리 아이어코카 전 크라이슬러 회장이 지난 1990년 뉴욕을 방문해 ‘닷지 바이퍼’에 걸터앉아 있다. /AP연합뉴스스
포드의 스테디셀러인 ‘머스탱’ 제작을 지휘하고 파산 직전의 크라이슬러를 구해내는 등 미국 자동차 산업을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받는 리 아이어코카(리도 앤서니 아이어코카) 전 크라이슬러 회장이 2일(현지시간) 사망했다. 향년 94세.
미 워싱턴포스트(WP)는 이날 아이어코카 전 회장이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파킨슨병에 따른 합병증으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지난 1924년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어코카 전 회장은 자동차 대여업자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1946년 포드에 기능공으로 입사한 그는 판매능력을 인정받아 36세 나이에 총지배인으로 승진했으며 1964년에는 포드를 대표하는 스포츠카 머스탱 출시를 지휘했다. 출시 첫해에만 40만대가 팔려나간 머스탱의 히트로 그는 1970년 12월 46세의 젊은 나이에 회장 자리까지 올랐다. 하지만 1978년 창업자 가문인 헨리 포드 2세와의 의견 충돌로 해고돼 크라이슬러로 자리를 옮겼다.
아이어코카 전 회장의 경영능력은 크라이슬러에서 더욱 빛났다. 제2차 석유파동으로 미국 경제가 침체에 빠진 상황에서 일본 자동차 회사들의 맹추격을 받은 크라이슬러는 당시 1억6,000만달러 규모의 분기 적자를 낼 만큼 위기에 처해 있었다. 1979년 사장으로 임명된 그는 직원 수만 명을 해고하고 임원 연봉도 대폭 삭감하는 등 혹독한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특히 아이어코카는 그 자신도 사장 첫해의 연봉으로 1달러만을 받아 이후 무수한 미국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의 ‘1달러 연봉’의 효시가 됐다. 직접 TV에 출연해 대국민 호소를 하면서 정부로부터 구제금융 15억달러를 받아낸 그의 노력으로 크라이슬러는 극적으로 파산을 회피할 수 있었다.
아이어코카 전 회장은 특히 비용절감을 통한 구조조정과 신제품 개발을 병행하며 본격적인 기업회생을 주도했다. 포드에서 실현하지 못한 고연비 차 ‘케이카’ 시리즈와 미국 첫 미니밴이 불황에 빠진 미국에서도 불티나게 팔리면서 1980년 17억달러 적자를 내던 회사는 1983년 정부 지원금을 예정보다 7년 앞당겨 4년 만에 상환하고 1984년에는 무려 24억달러의 흑자를 냈다. 그는 자신이 직접 TV 광고에 나와 “더 좋은 차가 있다면 그 제품을 사라”고 말할 만큼 회사 제품에 강한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후 아이어코카 전 회장의 진두지휘하에 1987년 지프·람보르기니 등을 인수한 크라이슬러는 미국 ‘톱3’ 자동차 기업으로 우뚝 섰다.
블룸버그통신은 “아이어코카는 논란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유명 자동차 경영인 시대의 시작을 알린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아이어코카 전 회장은 자유의 여신상 보수를 위한 기금 마련에 적극 동참하는 등 사회공헌 활동에도 활발하게 나서며 1980년대 중반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이어 미국인들이 존경하는 인물에 뽑히기도 했다. 하지만 1993년 크라이슬러를 떠난 뒤 1995년 억만장자 커크 커코리언의 크라이슬러 적대적 인수합병(M&A) 계획에 연루돼 비판에 휩싸였으며 회사와 소송전을 벌이기도 했다.
/김창영기자 kcy@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