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7년 7월1일, 중국 전통의상인 분홍색 치파오와 흰색 재킷을 차려입은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이 취임 이후 처음으로 홍콩을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함께 자신의 취임식 무대에 올랐다. 시 주석과 악수한 뒤 청중을 향해 돌아선 그의 표정과 태도에서는 홍콩 최초의 여성 수반이라는 타이틀만큼 당당함과 자신감과 묻어났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19년 7월1일, 홍콩 반환 22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같은 무대에 오른 람 장관의 표정은 어두웠다. 거리를 가득 메운 수십만명의 시위대를 피해 행사장까지 실내로 옮긴 그에게서는 위풍당당한 통치자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 그를 향한 외부의 시선은 혹독하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그는 기껏해야 남은 첫 임기를 레임덕으로 버틸 것이다. 그가 연임하려면 나사로(Lazarus)와 같은 정치적 부활이 필요할 것”이라고 논평했다. 사후 나흘 만에 예수가 부활시킨 나사로처럼 믿기 힘든 기적 없이는 최고지도자 자리를 지킬 수 없을 것이라는 뼈아픈 지적이다.
2년 만에 ‘홍콩의 대처’에서 ‘베이징의 꼭두각시’라는 민낯이 드러난 람 장관은 이제 그나마 홍콩 지도자라는 타이틀마저 잃을 위기에 처해 있다. 홍콩 정부의 ‘범죄인 인도법안’ 추진에 반대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위대를 통제하지 못한 채 정국을 극심한 혼란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급기야 1일에는 일부 시위대가 입법회(의회) 청사를 점거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다. 특히 람 장관은 2014년 홍콩 민주화시위인 ‘우산혁명’을 강경 진압한 공로로 중국 중앙정부의 눈에 들어 행정장관 자리에 오른 만큼 이번 시위 진압 실패로 정치적 치명상을 입을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이번 사태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이 홍콩 정부보다는 그 배후에 있는 시진핑 정부를 향하면서 중국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람 장관이 연임은 고사하고 3년이나 남은 임기를 채우기도 힘들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친중 성향의 홍콩 빈과일보는 람 장관 사퇴나 대규모 개각이 현실화할 수 있다며 이미 중국 정부가 적절한 시기를 모색하고 있을 가능성이 보인다고 전했다.
홍콩 최고지도자인 행정장관 사임이 중국에 좌지우지되는 것은 ‘일국양제(一國兩制)’ 원칙이 무색하게 중국 중앙정부가 홍콩의 내정에 직접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은 1997년 중국에 반환된 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병존하는 일국양제를 보장하는 홍콩 기본법에 따라 향후 50년간 정치적 자치권을 약속받았다. 이에 따라 홍콩 시민들은 직접선거로 행정장관을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중국은 중앙정부가 추천한 800명의 선거인단 간접선거를 통해 홍콩 행정장관을 임명하고 있다. 사실상 중국에서 내정한 친중파 후보가 계속 장관에 당선되며 홍콩 시민들의 직선제 요구는 매번 좌절을 겪고 있다.
이 같은 배경 때문에 홍콩 행정장관은 중국 중앙정부의 눈치를 보며 독립 성향의 시민들을 다독여야 하는 근본적인 딜레마에 처한다. 둘 사이의 외줄타기에 실패하면 가차 없이 물러나야 한다. 1997년 중국 귀속과 동시에 임기를 시작한 1대 장관 둥젠화는 5년간의 첫 임기를 마치고 2002년 연임에 성공했지만 임기를 2년 남긴 2005년 돌연 사퇴의사를 밝혔다. 표면적 이유는 건강악화였지만 당시 언론들은 그가 2003년에 추진했던 국가보안법이 반대시위에 가로막혀 무산되면서 중국 정부로부터 퇴임 압박을 받았다고 전했다. 둥 장관의 공석을 대리하다 2007년 3대 장관에 당선된 도널드 창은 중국의 노골적인 간섭에 홍콩 시민들의 불만이 고조됐음에도 ‘중국의 예스맨’ 노릇을 해 비난을 받았다. 여기에 잇따른 부정부패로 지지율이 곤두박질친 그는 사상 처음으로 탄핵 대상에 오르면서 연임 없이 장관직을 끝냈다. 그는 2015년 부패 혐의로 기소당한 후 지난해 징역형이 선고됐다. 4대 장관인 렁춘잉은 2012년 선거 때 유력 후보가 스캔들로 낙마한 후 뒤늦게 중국의 지지를 등에 업고 당선됐다. 렁 역시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하는 2014년 우산혁명 시위 당시 중국 편에 서면서 거센 비판을 받았다. 결국 그는 2016년 12월 “출마하면 가족이 참을 수 없는 스트레스에 시달릴 것”이라며 연임 포기를 선언했다.
홍콩 전역을 뒤흔들고 있는 범죄인 인도법안 반대시위는 이미 람 장관의 사임 요구를 넘어 대규모 반중국시위로 확대돼 우산혁명 때보다 더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홍콩 반환 이후 계속돼온 민주화시위에도 일국양제가 흔들리고 중국화가 가속되면서 젊은이들의 분노와 절망감이 폭발한 것이다. 1일 입법회 청사를 점거한 일부 시위대가 ‘폭도는 없고 폭정만 있을 뿐’이라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내걸고 영국 통치 시절의 홍콩국기를 흔들면서 중국 통치에 대한 사실상의 전면적 도전이 시작됐다는 해석이 나온다. 이에 대해 홍콩 경찰도 수십명의 시위대를 체포하는 등 대대적인 강경 진압에 나서 홍콩의 앞날은 예단할 수 없게 됐다. 시 주석이 중국의 권위에 도전하는 홍콩 시위 사태에 직접 개입해 1989년 톈안먼 사태 때처럼 폭력진압을 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실제 홍콩에 주둔하는 중국 인민해방군은 최근 홍콩 인근 해상과 공중에서 연합순찰훈련을 실시하며 무력동원이 가능하다는 무언의 경고를 날렸다.
홍콩 시민과 중국 중앙정부 사이에 낀 람 장관은 중국의 지시 없이 법안 철회에 대한 명확한 입장도, 자신의 거취도 밝히기 힘든 국정운영 불능 상태에 빠져 있다. 홍콩의 마지막 총독을 지낸 영국 원로정치인 크리스 패튼은 람 장관에게 “진정한 친구는 홍콩 시민들뿐”이라며 이 같은 충고를 남겼다. “그는 결코 베이징 공산당원들과 동일한 정도의 신임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들에게 그는 항상 쓰고 버려도 괜찮은 일회용 존재일 뿐이다.”
/박민주기자 parkmj@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