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양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총장은 지난 5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일본의 수출규제와 관련해 “사태가 반도체 장비 등으로 확산되고 장기화될 것”이라며 “정부가 일본과 협상하며 시간을 벌면서 국산화를 위한 관산학연 시스템 구축에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서울경제DB
“대학이나 정부출연 연구원에서 소재·부품·장비 연구를 해도 논문 쓰기 쉬운 새로운 분야를 원하지, 산업화가 필요한 전통적인 주제를 안 하려고 해요. 중소·중견기업이 소재·부품·장비를 개발해도 대기업이나 대학·연구소에서 시험적으로도 잘 써주지를 않습니다.”
국양(66)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총장은 지난 5일 광화문 DGIST 사무소에서 가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일본의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수출규제 등 경제보복과 관련해 “정부가 일본과 협상하며 시간을 벌면서 소재·부품·장비 국산화가 이뤄질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사태가 중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보복 이상으로 후유증이 클 것 같은데.
△일본이 지난해부터 준비를 많이 해와 사태가 오래갈 것이다. 오는 21일 일본 참의원선거가 끝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수출규제 품목이 늘어날 것이다. 일본인들은 치밀하고 꼼꼼하다. 칼을 빼 들었다는 것은 이것저것 많이 따져 자신들도 피해를 보지만 한국에 훨씬 더 타격을 미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3일 북한이나 이란 등에 무기와 관련 기술의 이전을 금하는 바세나르협약을 든 데 이어 7일에는 한국이 대북제재를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봐 수출규제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을 ‘위험국가’나 ‘적대국가’로 규정한 셈이다.)
-이번 사태의 전망을 어떻게 보나.
△일본의 소재·부품사도 피해를 보고 앞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공급에 지장이 생기면 일본의 전자회사들 역시 피해를 입겠지만 당장 우리 피해가 훨씬 크지 않겠나. 국제분업체계가 기본인데 한 나라가 타국에 기술수출을 금지하는 것은 부당하다. 협상을 통해 잘 해결됐으면 하는데 나중에 일본이 원하는 게 적지 않게 반영되지 않을까 싶다. (일본은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판결과 관련해 오는 18일 이후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할 방침이다. 우리나라 정부가 미국에 중재 요청을 검토하고 있으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한일관계에 직접 개입을 꺼리는 것이 변수다.)
국양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총장은 지난 5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일본의 수출규제와 관련, “사태가 반도체 장비 등으로 확산되고 장기화될 것”이라며 “정부가 일본과 협상하며 시간을 벌면서 국산화를 위한 관산학연 시스템 구축에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서울경제DB
-일본이 경제보복을 어디로 더 늘릴 것 같나.
△일본이 우리 가슴 아픈 것만 콕콕 찌를 수 있다. 이번 수출규제 품목인 반도체 기판용 감광제나 세정용 에칭가스, 디스플레이용 폴리이미드 필름 중 불화수소는 대만에도 업체가 있으나 일본의 품질이 제일 좋다. 쓰던 것을 바꾸면 수율이 낮아지고 공정에 시간이 걸리는 문제가 있다. 일본이 반도체 장비 등으로 수출규제를 넓힐 것으로 본다. 일본이 장비 분야에서 워낙 뛰어난데 세계 1등인 노광장비 등 공정장비를 수출규제에 포함하면 당장 문제가 나타난다. 노광장비·스테퍼 등 하나씩 공격해 들어오면 속수무책이다. 이번 세 품목의 피해는 5~6개월 뒤의 문제지만 정말 우리 피해가 커지고 힘들어질 것이다. 반도체 공장의 큰 라인 하나 깔려면 1조~2조원이 드는데 그 안의 장비가 오죽 많나. 우리의 경우 정확한 수율을 좌우하는 공정장비 쪽이 약하다.
-소재·부품도 한일 간 격차가 큰데.
△우리도 소재·부품·장비 개발을 많이 해왔지만 일본 기술이 훨씬 앞서 있다. 소재물질을 다루는 유기합성 등 일본이 굉장히 앞서 있는 게 많다. 광학·정밀장비와 유기·무기 소재의 전통도 깊고 잘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일제를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성과가 좋아서다. 우리 중소·중견기업이 개발하기를 기다릴 시간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나서도 시장지배력을 획득하기 어려운 싸움이 되겠지만 그래도 박차를 가해야 한다.
-중소·중견기업이 개발해도 대기업이 국산을 잘 쓰지 않는데.
△그렇다. 대기업의 현장 엔지니어는 소재·부품·장비 국산화가 이뤄지더라도 ‘뭘 믿고 쓰냐’며 주저한다. 새로운 것을 써 수율이 낮아지면 책임을 져야 한다. 수리 분야마저 국산이 완벽하지 않으면 안 받아준다. 1990년대부터 중소업체에서도 장비 개발을 하는 곳이 꽤 있는데 대기업에 들어가기 힘들다. 삼성이나 SK하이닉스는 10나노미터(1나노미터는 10억분의1m) 근방까지는 KrF· ArF 라는 광원을 쓰는 노광장비와 그를 위한 레지스트를 쓰는데 이 레지스트는 이번 조치에는 포함이 안 됐다. 현재 개발 중인 공정은 극자외선을 광원으로 쓰는 10나노 이하인데, 대학과 연구소는 100나노 근방 공정을 위한 광원과 레지스트를 쓴다. 새로운 공정장비와 레지스트를 개발하고 테스트도 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장치가 필요하다. 대기업도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한두 개 라인은 국산 소재·장비를 써봐야 한다. 맨날 일제에 매여 있으면 영영 못 벗어난다.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빨리 대체 공급처를 찾아야 하는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외교적으로 풀 수밖에 없는데 정부가 일본과 협상하며 어떻게든 시간을 벌고 소재·부품·장비의 국산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일본의 약점이 뭔지 파악해야 거래도 되고 시간도 벌 수 있다. 중소·중견기업이 개발한 것을 대기업이 써주도록 해야 한다. 국가 연구개발(R&D)을 통해 나온 소재·부품·장비를 대학과 출연연의 실험실과 대기업 공장 라인에서 테스트하도록 정부가 조정해야 한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진작 정교하게 나섰어야 했다. 중소·중견기업의 신제품이 삼성 등에 못 들어가면 어떻게 해외로 나갈 수 있겠나.
-교수나 출연연 연구원도 산업 분야에 꼭 필요한 소재·부품·장비 연구에 소홀한데.
△교수나 출연연 연구원은 장비나 소재개발을 해도 빛이 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조금씩 개선해나가는 일이라 논문을 많이 쓰거나 특허를 많이 낼 수 없어서다. 고생은 많이 하는데…. 그래핀이나 2차 소재 등 논문 쓰기 좋고 인기 좋은 소재연구에 몰린다. (2023년까지 10년간 1조5,000억원을 지원하는)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도 저변을 넓히기 위해 잘 팔릴 수 있는 소재 연구를 지원하는데 연구자 자유과제로 하니 논문을 잘 쓸 수 있는 쪽을 하지 산업화하는 일은 덜 하더라. 논문 쓰는 연구도 필요하지만 산업에 응용되거나 개발을 위한 연구도 해야 한다. 연구자도 업계와 네트워크 구축이 안 돼 산업화를 하려고 해도 잘 안되는 애로가 있다.
-일본은 관산학연(官産學硏) 체제가 잘돼 있는데.
△일본은 보수적이고 전통사회라 그런지 몰라도 관산학연 네트워크가 잘 형성돼 있는데 우리는 단절돼 있다. 일본은 소재·부품·장비를 개발하면 정부가 도와준다. 교수나 연구자들에게 연구비를 꾸준히 몇 년을 더 준다든지 중소·중견기업이 개발한 것을 대기업이 테스트하도록 알선해준다. 우리도 일본처럼 효율적으로 관산학연을 디자인해 선순환 사이클을 만들어야 한다. (정부는 “세계 4대 소재강국으로 거듭나겠다”며 지난 2010년 WPM(World Premier Materials) 사업을 하며 대기업을 비롯해 중소기업과 대학·출연연으로 10개 사업단을 꾸려 7,000억원 가까이 투자했으나 경제보복에 허점을 드러냈다.)
국양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총장은 지난 5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수출규제와 관련, “사태가 반도체 장비 등으로 확산되고 장기화될 것”이라며 “정부가 협상하며 시간을 벌면서 국산화를 위한 관산학연 시스템 구축에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서울경제DB
국 총장은 인공지능(AI) 교육 강화 등 대학 혁신과 함께 정부 R&D의 기초연구 강화도 강조했다.
-20조원이 넘는 R&D 예산을 대학·출연연·기업에 지원할 때 기획도 부족하고 기초연구나 산업화 성과도 낮은데.
△기초연구를 해야 소재·부품 분야를 키우는데 대학이나 출연연이나 부족하다. 누군가 뚝심 있게 해야 하는데…. 장비는 기계공학에서 하는데 요즘은 기계공학도 바이오·나노 등 최신 연구를 많이 하지 공정기계 등은 주요 대학에서는 잘 연구하지 않는다. 일본은 장인정신이 있어 꾸준히 기초연구를 한다. 그들의 100년 전통을 우습게 보면 안 된다. 교수가 은퇴해도 제자에게 연구실을 물려주지 않나. 우리는 (35개 부·처·위원회에서 산하기관과 함께) R&D 기획을 할 때도 세심하지 않다. 산학연 융합팀을 만들어도 크게 돈을 벌거나 성공한 예가 별로 없다.
-외부 환경에 비해 대학의 변화가 더딘데.
△(KAIST·DGIST 등 4개) 과기특성화대는 다른 대학보다는 기술사업화에 관심이 높은데 아직도 보수적인 느낌이 많이 든다. 서구 대학과 비교하면 굉장히 늦다. 전공 간 벽이나 연구자의 보수성이 좌지우지해서는 안 된다. 훨씬 더 혁신적이어야 한다.
-최근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인공지능 육성을 강조했는데.
△미국은 4차 산업혁명이라 부르지 않고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igital transformation)이라고 한다. 소프트웨어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대학도 소프트웨어와 데이터사이언스 교육을 잘해 세계 시장을 겨냥한 인공지능 개발자를 키워야 한다. DGIST도 소프트웨어 교육을 강화하려고 한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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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물리학박사 학위를 받고 지난 1991년까지 10년간 AT&T벨연구소에 근무하다 귀국해 지난해까지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를 지냈다. 2014년부터 올해 초까지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 이사장으로서 ‘정부 R&D 과제로는 못 하는 것과 독특한 것을 맘껏 연구하게 만들자’는 취지로 기초과학·소재기술·정보통신기술(ICT) 창의과제를 지원했다. 올 초 DGIST 총장에 부임한 뒤 소수의 학생으로 높은 연구성과를 내는 캘리포니아공대 등을 롤모델로 삼아 정보기술(IT)과 바이오를 집중 육성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