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대구 시내 한 대형 일식집 외관에 일본 주류판매를 중단한다는 현수막이 걸려있다./연합뉴스
정부가 일본의 대한(對韓) 수출규제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한 대외 여론전에 착수했다. 특히 정부는 그간 한일 갈등이 촉발될 때마다 ‘보이지 않는’ 중재자 역할을 해온 미국을 대상으로 우리 측 입장을 지지해줄 것과 더불어 적극적 중재를 요청하기로 했다. 일본의 수출규제로 반도체 등 한국 산업이 타격을 입으면 애플·퀄컴 등 미국 기업들도 부정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미국 설득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아울러 외교적인 측면에서 한일 갈등이 북핵 협상, 미중 무역협상 등이 예고된 시점에서 한미일 동맹 균열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도 강조할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당장 적극적으로 움직여줄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관측했다. 역대 미국 정부와 달리 눈앞의 미국 이익 훼손에 직결되지 않는 한 타국의 복합적 갈등 상황에 뛰어들지 않으려 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9일 외교부와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김희상 외교부 양자경제외교국장과 유명희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잇따라 워싱턴으로 향한다. 우선 김 국장은 11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롤런드 드 마셀러스 미 국무부 국제금융개발담당 부차관보, 마크 내퍼 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 등과 만날 예정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당초 방미 목적은 연말로 예정된 한미 고위급경제협의회를 준비하는 것이었지만 현재 한일관계가 심각한 만큼 미국의 협조 등을 요청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다음 주에는 유명희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도 미국을 전격 방문, 미국 통상 당국자들을 만날 것으로 알려졌다. 유 본부장은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에 대한 구체적 대응 방안을 밝히지 않고 있으나 세계무역기구(WTO) 위반이라는 점과 동시에 일본의 조치로 한국 기업뿐 아니라 미국 기업에도 부정적 영향이 있을 수 있다는 논리를 펼 것으로 관측된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일본 수출규제강화조치와 관련한 브리핑을 하고 있다.
미국 현지에서 정면 돌파를 시도하는 동시에 정부는 다자 무대에서도 일본을 압박하기 위한 여론전을 강화하기로 했다. 정부는 9일(현지시간) 제네바에서 열린 WTO 상품·무역 이사회에 일본의 경제보복 문제를 긴급 의제로 상정했다. 일본의 대한(對韓) 수출 규제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한 조치로, 정부는 앞으로 이 문제를 지속적으로 국제무대에서 공론화해 대일 압박을 강화할 계획이다. 외교부에 따르면 WTO 상품·무역 이사회는 지난 8일 이틀간의 일정으로 개회됐다. 이사회에서 다뤄질 일반 안건들은 이미 확정됐으나 우리 정부는 이번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회의 개최 직전 긴급 의제로 상정했다.
또 성윤모 산업부 장관은 “오는 12일 오후 일본 도쿄에서 양자 협의를 진행하는 것으로 조율하고 있다”며 “WTO 등 다자·양자 간 기회를 통해서도 국제사회에 한국의 정당성을 이야기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외교가에서는 일본 역시 미국의 핵심 동맹국이기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이 당분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며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했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와 트럼프 행정부는 다르다”며 “한국에서는 일본의 수출 규제가 미국 기업에도 타격이 될 것이라는 데 큰 기대를 걸고 있지만 반사이익을 보는 미국 기업도 있을 수 있다”며 “경제적 이익을 중시하는 미국이 우선은 계산을 열심히 할 것”이라고 전했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미국도 한국이 한일협정 청구권에 있는 내용을 지키지 않았다는 일본의 논리를 신경 쓸 수밖에 없다”며 “우리의 여론전이 바로 먹히기는 힘들다”고 전망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6월30일 오후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공동기자회견 중 발언하고 있다./연합뉴스
전문가들은 일본의 18일 추가 경제보복 조치에 따른 한국의 WTO 제소 등 한일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시점에 트럼프 대통령이 중재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고 있다. 일본정부가 제3국을 통한 중재위원회 설치를 요청한 것에 대한 한국의 최종답변 시한이 18일로 예고된 만큼 2차 경제보복 조치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 신 센터장은 “동북아 지역의 패권에 대한 중국의 도전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한미일의 견고한 동맹이 중요하다는 관점에서 어느 일방이 공세적으로 나오는 것은 미국도 부담일 수밖에 없다”며 “그 점에 착안해 일본이 추가적인 보복조치에 나서거나 외교적 교섭을 거부할 때 미국 카드가 통할 수 있기 때문에 사전에 대미 외교에 공을 들여야 한다”고 제언했다.
/정영현·박우인기자 yhchu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