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 을축년 대홍수

1925년 두달 폭우, 최악 물난리

을축년 한강 범람으로 물에 잠긴 서울 용산의 모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아, 하늘이 조선을 아주 미워하고 저주하여 끝내 저버리려 함인가!’ 한반도 전역이 물난리를 겪었던 1925년 을축년. 대홍수 현장을 보도하던 당시 어느 기자가 쓴 탄식 조의 기사다. 7월 초순부터 9월까지 모두 네 차례 조선을 덮친 대홍수로 인한 추정 피해액만 1억300만원. 조선총독부 연간 예산의 58%에 해당하는 재산가치를 수마가 삼켰다. 사망자 647명이 발생하고 가옥 6,363여채가 거센 물길에 휩쓸려 없어졌다. 붕괴된 가옥이 1만7,045채, 침수피해는 4만6,813채에 이르렀다.


관측이 시작된 이래 한반도 최대의 물난리라는 을축년 대홍수는 11일 오후부터 찾아왔다. 대만 부근에서 생성된 열대성 저기압(태풍)이 300∼500㎜의 집중호우를 뿌렸다. 황해도 이남지역의 모든 강이 범람한 가운데 피해가 컸던 곳은 서울 동북쪽 지역. 뚝섬과 왕십리 일대가 잠겼다. 닷새 뒤 1차 홍수의 물이 채 빠져나가지도 못한 판에 한강과 임진강 유역에 2차 홍수가 났다. 경성 외곽인 송파와 잠실·풍납리 등과 용산 지역이 물바다가 됐다. 북한 지역에 집중된 3차 홍수로 대동강과 청천강·압록강이 넘쳤다. 9월 초 4차 홍수는 남해안 일대를 할퀴었다.

네 차례 홍수에서 피해가 가장 컸던 지역은 식민지 조선의 수도인 경성. 한강 인도교 북단이 떠내려가고 용산에 집중된 철도시설이 물에 잠겼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던 용산이 침수되자 신속하고 적극적인 대응에 나섰다. 공병대 보트를 투입해 떠내려가거나 지붕에 고립된 사람들을 구조하고 수재민을 수용할 시설을 세웠다. 수마가 휩쓴 뒤에는 물가고와 생활고가 찾아왔다. 뚝섬과 왕십리·잠실 지역의 밭이 진흙탕으로 변해 경성의 물가가 자고 나면 올랐다.

지형도 변했다. 뚝섬과 잠실섬이 줄어들고 한강 복구를 위한 골재 채취로 높은 봉우리였던 한강 하구의 선유봉이 낮은 높이의 선유도로 바뀌었다. 거센 물줄기로 빛을 본 역사도 있다. 암사동 선사유적지가 대거 노출되고 풍납토성이 백제의 왕궁터였다는 가설이 사실로 밝혀졌다. 인간성도 다양한 모습을 드러냈다. 봉은사 주지 청호 스님은 사람을 구해오는 뱃사공에게 돈을 주며 708명의 목숨을 구해 ‘살아 있는 부처’라는 칭송을 받았다. 민족언론들이 열렬한 동포애와 인류애를 강조하는 이면에서 일부 상인과 지주들은 폭리를 취하고 소작료를 올렸다. 수재민이 받은 수재의연금을 그 자리에서 세금으로 거둬간 사례도 있다. 다시는 이 땅에 수해와 인재(人災)가 없기를.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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