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28일 오전 인텍스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공식환영식에서 의장국인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와 악수한 뒤 이동하고 있다. /오사카=연합뉴스
한일 갈등의 출구전략으로 거론되던 미국의 중재가 사실상 어려워진 가운데 일본이 다음달 15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전략물자 수출절차 간소화 우대국 목록)에서 제외하겠다고 밝혀 한일 경제전쟁이 장기전으로 흐르는 모양새다.
일본 측의 화이트리스트 제외에 따른 우리 산업에 대한 광범위한 보복이 예고된 날은 공교롭게도 일제의 불법 식민지배하에서 광복을 맞은 날이어서 일본의 수출보복으로 인한 양국 갈등이 문화·안보 등으로 확전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일본은 지난 1일 우리나라를 안보 우방국인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겠다고 고시한 기존 방침을 12일 한일 양자협의에서 거듭 주장했다. 오는 24일까지 의견수렴을 거치고 각의에서 결정한 뒤 공포한 후 21일이 경과한 날부터 시행될 것이라는 시간표를 고려해보면 다음달 15일을 전후해 1,100여개에 달하는 품목에 대한 규제 조치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당장은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판결 갈등과 관련, 우리 정부가 일본의 3국 중재위원회 요청에 대한 최종 답변 시한인 18일 일본의 3국 중재위 요청을 거부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아베 정권은 이를 문제 삼아 예고대로 2차 경제 보복조치를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그보다 앞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대리인단이 15일 미쓰비시중공업을 대상으로 자산 현금화 신청에 들어간다고 예고한 만큼 일본 정부의 2차 경제보복 조치가 앞당겨질 가능성도 있다.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는 “일본은 과거 2011년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우리 정부의 중재위 설치 요청을 2차례 거부한 사례가 있다”며 “자신들 스스로 한국 정부가 이를 받지 않을 것을 잘 알면서도 중재위 설치를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한국 때리기를 위한 명분 쌓기에 불과하다”고 진단했다.
2차 경제보복 조치가 실제로 시행될 경우 한일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양국은 23일과 24일 양일간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일본의 대(對)한국 수출 규제와 관련한 공방전을 벌인다. 경제전쟁 발발 이후 양국 정부가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여론전에 공을 들이고 있는 만큼 한국과 일본은 이 자리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강경화(오른쪽) 외교부 장관과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이 지난 2월 독일에서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갖고 악수하고 있다./뮌헨=연합뉴스
전문가들은 차분한 대응을 주문하면서도 우리 정부가 물밑으로 일본 정부와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특히 다음달 1일 열리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외교장관회의는 한일 관계를 가늠해볼 수 있는 시금석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아베 신조 정권 역시 한일 관계 악화가 장기화할 경우 일본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이 있는 만큼 21일 열리는 참의원 선거가 끝난 뒤 출구전략을 고민할 수도 있다.
양 교수는 “화이트리스트 제외 등은 막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 정부가 물밑에서 정치적 협상을 하는 게 좋다”며 “우리 정부가 적극적으로 강제징용 배상판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금을 조성하는 등 한일관계와 관련,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처럼 실용외교를 펼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일각에서는 아베 신조 총리의 최종 목적이 참의원 선거를 넘어 평화헌법(일본의 전력(戰力) 및 국가 교전권 불인정) 개정에 있는 만큼 한일 긴장관계를 계속 유지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도 제기된다. 이에 따라 외교적 해결을 위한 대미(對美) 외교에도 꾸준히 힘을 쏟아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실제 한일 경제전쟁 발발에도 소극적이던 트럼프 행정부가 데이비드 스틸웰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의 한일 순방일정과 맞물려 한미일 고위급 협의를 검토한 것으로 알려지는 등 미국이 한일갈등 출구전략 마련에 나선 것 아니냐는 관측도 조심스럽게 제기됐다.
앞서 일본을 방문 중인 스틸웰 차관보는 일본 NHK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대한 수출규제와 관련, “미국은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굳건한 동맹 관계에 틈이나 균열이 생기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면서 “(한일) 양국 관계의 긴장은 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우려를 표한 바 있다./박우인기자 wipark@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