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사찰과 판결 지연 등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전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비롯해 수십명의 판사들이 무더기로 재판에 넘겨진 가운데 재판부 제척·기피·회피 신청 건수가 올해 상반기에만 약 400건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위헌법률심판제청 신청 건수도 이미 200건을 넘겨 사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는 분위기다.
13일 대법원에 따르면 불공평한 재판을 받을 염려가 있을 경우 특정 판사나 재판부를 사건의 심리로부터 제외하는 제척·기피와 판사가 스스로 재판 재배당을 요구하는 회피 신청 건수가 올해 7월13일 기준 399건으로 집계됐다. 이 같은 추세로라면 올해 800건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제척·기피·회피 신청 건수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불거진 2017년 694건에서 지난해 753건으로 계속해 증가추세다.
여기에 재판에 적용되는 법률이 문제가 된다며 소송 당사자가 해당 법률의 위헌 여부를 헌법재판소에서 심판해 달라고 위헌법률심판제청을 신청할 수도 있는데, 이 건수 역시 2017년 이후 같이 늘어나는 모양새다. 서울소재 한 대형로펌 대표 변호사는 “법원이 소송 당사자의 신청을 받아들이는 인용건수는 드물지만 재판부의 판단을 믿지 못하겠다는 불신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판사를 상대로 한 재판 불복 진정·청원 건수도 해마다 급증하고 있다. 대법원 전산정보국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에만 ‘재판결과에 불만이 있다’며 이미 1,653건의 진정·청원이 들어온 상태다. 지난 2015년 1,595건이던 재판결과 불만 진정·청원은 이듬해 1,211건으로 주춤하는 듯 했으나 양승태 전 사법부의 사법농단 의혹 이후 3,081건으로 치솟더니 지난해에는 4,200건을 넘어섰다.
법조계에서는 이런 기류에 대해 법치주의의 근간이 흔들린다며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법치주의가 흔들리는 순간 민주주의는 물론 자본주의 질서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걱정이다. 부장판사 출신 변호호사는 “국민들이 법원을 믿지 못하게 되면 비용이 많이 들어도 사적인 분쟁조정절차를 활용하게 될 것”이라며 “결국 시간이나 비용이 많이 들어도 법원을 덜 이용하게 되고 분쟁 발생 시 각자도생의 길을 택하는 것”이라고 걱정했다.
재판에 승복을 하는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형사재판에 국민들이 참여하는 배심제가 확대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과거의 진실을 사법부가 밝힐 수 없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미국처럼 상황에 따라 일반 사람들의 상식대로 판결이 날 것이란 분석이다. 서울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판결이 그때그때 달라 예측이 불가능해지면 민사든 형사든 재판에 가기 전에 사적 합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며 “이 같은 흐름은 법치라는 틀 안에서 효율성과 형평성을 추구하려던 풍토가 급격히 무너지는 전조 현상으로 보인다”며 안타까워했다. /백주연기자 nice89@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