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
조철현 감독.
오는 24일 개봉하는 영화 ‘나랏말싸미’를 연출한 조철현(60) 감독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는 30년 동안 충무로에 몸담으면서 영화 제작자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다. 현재는 영화사 타이거픽쳐스의 대표를 맡고 있다. ‘나랏말싸미’는 그런 그가 처음으로 장편영화 연출에 도전한 작품이다. 한국 영화계에서 제작자 출신이 감독으로도 성공한 사례는 의외로 많지 않다. ‘왕의 남자’ ‘사도’의 이준익(60) 감독이 사실상 유일하다.
영화사 씨네월드의 대표였던 이준익은 1993년 감독 데뷔작인 ‘키드 캅’을 내놓았으나 쓰디쓴 실패를 경험했다. 이후 제작에만 전념하다가 2003년 두 번째 연출작인 ‘황산벌’이 크게 성공하면서 잘 나가는 영화 감독으로 입지를 굳혔다. 그 외에 제작자 출신이 직접 만든 작품은 흥행에 성공하지도, 영화사에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기지도 못하고 빠르게 잊혔다. 조철현 감독이 ‘제2의 이준익’이 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재미있는 것은 조 감독과 이 감독이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낸 영화적 동지라는 점이다. 조 감독은 ‘황산벌’ ‘즐거운 인생’ ‘님은 먼 곳에’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평양성’ 등 이 감독의 다양한 연출작에 제작자로 참여했다. ‘황산벌’ ‘평양성’ ‘사도’ 등은 이 감독과 함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조 감독은 ‘사극 마스터’인 이 감독과 작업하며 쌓은 노하우를 제대로 활용하고 싶어 연출 데뷔작의 장르도 사극으로 골랐다.
영화 ‘나랏말싸미’의 스틸컷.
‘나랏말싸미’는 문자와 지식을 권력으로 독점한 조선 시대 모든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의 마지막 8년을 그린 영화다. 세종(송강호 분)과 스님 신미(박해일 분)가 함께 한글을 만들었다는 창제설을 소재로 했다. 최근 세상을 떠나 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고(故) 전미선이 소헌왕후를 연기했다. 지난 14일 언론 시사회를 통해 베일을 벗은 ‘나랏말싸미’는 신인 감독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연출력이 돋보였다. 매 장면의 호흡은 진중하고 묵직하며 공들여 찍은 티가 역력한 미장센도 수준급이다.
다만 불교와 유교의 갈등을 중언부언하면서 서사의 흐름을 지연시키는 것은 단점으로 지적할 만했다. 군데군데 자연스러운 유머가 섞여 있으나 기본적으로 진지하고 엄숙한 태도를 시종 견지하는 이 영화가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라이온 킹’과 같은 할리우드 대작들의 틈새에서 얼마나 강력한 관객 동원력을 과시할지도 미지수다.
그동안 충무로에서 이준익을 제외하면 장편영화 연출에 나선 제작자 가운데 짜릿한 성공을 맛본 이는 거의 없었다. 명필름의 이은 대표는 지난 1998년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의 감독으로 관객과 만났으나 뻔한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답습하며 고만고만한 성적을 거뒀다. 청년필름의 대표인 김조광수는 2012년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으로 연출자로서의 가능성을 내비쳤으나 저예산 독립영화인 탓에 많은 관객을 동원하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멋진 하루’ ‘10억’ 등을 제작한 조성규 스폰지이엔티 대표 역시 2010년 ‘맛있는 인생’으로 데뷔한 이후 꾸준히 작품을 만들고 있으나 아직 뚜렷한 성공작은 없는 상황이다. /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