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윤 KTB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밥벌이가 한국 주식시장에 얽혀 있는 사람들은 요즘 통 기운이 없다. 글로벌 벤치마크의 한국주식 편입비중 축소, 공모펀드의 자금 유출, 주요국 증시 중 한국 수익률 꼴찌 같은 소식에 피로가 누적된다. 국내 자산에서 해외자산으로, 주식에서 대체자산으로 자금의 이동 속에 ‘한국’ ‘주식’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소외감이 크다. 상황이 이 지경인데 경기 규칙까지 공정하지 않다면 선수들에게 분발을 바라는 것은 무리다.
레버리지론에 대한 우려를 종종 접하게 된다. 최근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은 미국의 레버리지론 잔액이 약 1조1,000억달러라고 밝혔는데 최근 10년 사이 두 배로 증가한 수치다. 전 세계적으로는 유사한 대출의 규모가 2조2,000억달러라는 게 영국중앙은행(Bank of England)의 의견이다. 이미 규모 면에서는 금융위기 직전의 서브프라임모기지 1조1,000억달러를 넘어선데다 느슨한 대출약정에 대한 지적도 끊이지 않아 다음 금융위기의 진앙지라는 경고음이 들린다. 부도율이 안정적이고 변동금리 채권이라 미국 금리 인하 시그널 이후 최근까지 30주 이상 연속 순유출 중이어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기에 무리가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121개월이라는 경기 확장 신기록을 갈아치운 미국 경기가 침체 사이클로 접어들 때 레버리지론이 미칠 파장을 걱정하는 시선은 여전하다. 특히 문제는 대출약정과 관련해 느슨한 약식계약(covenant-lite) 형태의 발행 비중이 금융위기 이전 4분의1 정도에서 최근 80% 수준에 육박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대표적인 재무 약정인 감가상각전영업이익 대비 차입금(Debt/EBITDA) 배수에서 분모인 EBITDA를 불신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다. EBITDA를 산출할 때 영업이익에서 비현금성비용을 더하는 과정에 발행자 측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다는 의견이다.
한국 금융시장에서는 최근 전환사채(CB)와 관련된 부정적 소식을 자주 접하게 된다. CB 발행건수는 지난 2017년 189건에서 2018년 258건으로, 발행액수는 같은 기간 약 2조4,000억원에서 약 3조2,000억원으로 증가했다. 2018년 하반기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최근 1년만 보면 무려 330건에 4조7,000억원이다. 코스닥벤처펀드라는 대형 수요처가 등장한 탓이다. 전환가격 조정(리픽싱)과 관련된 기존주주 피해 이슈, 대주주의 콜옵션 악용 이슈, 재무적 곤경에 처할 수 있는 조기상환 풋백옵션 이슈까지 주가가 오르면 오르는 대로, 내리면 내리는 대로 부작용이 끊이질 않는다. 벤처산업 육성은 장기적 정책과제이므로 지금 시점에서 코스닥벤처펀드의 잘잘못을 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걱정스러운 것은 미국 레버리지론에 대한 우려처럼 느슨한 발행조건과 허술한 밸류에이션 문제를 한국의 CB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생 적자기업이 불확실한 몇 년 후의 EBITDA 추정치에 기반한 기업가치로 별반 할인 없이 신주를 발행한다. 대부분 사모로 발행되지만 결국에는 주주의 피해가 될 수 있다. 자칫하면 단지 코스닥 시장이 어려운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벤처 생태계, 금융투자업계 전반에도 타격이 될 수 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업계 전반으로 누가 무엇이라 지적하지 않으니 언제부턴가 밸류에이션은 대강해도 된다는 풍조가 생겨난 듯하다. 누구는 밸류에이션을 허술하게 해도 돈을 쉽게 벌고 그 뒤 감당은 일반 주주, 공모 주식펀드 매니저, 애널리스트들이 해야 한다면 국내 증시의 엑소더스는 빨라질 것이다. 한국 주식시장을 살리는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밖에 없다. 시장 참여자들이 각자 자기 자리에 걸맞게 행동하는 것이다. 금융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공무원답게, 분석하는 애널리스트답게, 운용하는 매니저답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