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What] 무역전쟁에도 속수무책…WTO '식물기구' 전락 시간문제

트럼프, 관세 무기화 일삼자
유럽·中도 보복관세 맞대응
日까지 對韓 수출제한 나서
G20 작년부터 새 규제 20개
무역질서 날로 혼탁해지는데
상소기구 3인체제 겨우 운영
올 위원 2명 임기만료 앞두고
美, 인선 거부로 '마비' 위기


“모든 기능이 긴장상태인 세계무역기구(WTO)는 지금 존립 위기와 직결될 수 있는 최대 시험에 직면했다. 세계 무역 시스템을 보호하기 위한 긴급대응이 절실하다.”

리엄 폭스 영국 국제통상장관은 지난달 일본 쓰쿠바에서 열린 주요20개국(G20) 통상·디지털경제장관회의에 참석한 뒤 이같이 지적했다. 세계 무역질서의 수호자에서 ‘방관자’로 전락하며 존재 이유가 사라져 가는 WTO에 대한 경고였다. 하지만 3주 뒤 오사카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의는 결국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공동성명에 ‘보호무역주의 반대’ 문구를 담지 못한 채 폐막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지난해 3월 중국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시작된 글로벌 무역전쟁이 제어불능 상태에 빠지면서 ‘WTO 무용론’이 확산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탈퇴 운운하며 WTO를 뒤흔든 데 이어 다른 무역대국들도 제 입맛에 맞지 않는 결정이 나올 때마다 ‘WTO 때리기’에 가세해 최고 통상기구로서의 중재 역할은 마비 직전에 이르렀다.

WTO는 자유무역으로 세계경제 발전을 돕는다는 취지로 지난 1995년 1월1일 스위스 제네바에 설립됐다. 1947년 체결된 국제무역협정인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의 제8차 무역협상(우루과이라운드)에 따라 GATT를 대체하는 WTO가 출범했다. 제조업 관세 인하에 주력했던 GATT와 달리 WTO는 규율 대상을 넓히고 이행 수준을 강화하면서 오늘날의 국제통상 체제를 확립했다. 회원국은 창설멤버인 한국을 포함해 164개국에 달한다. 연간 예산은 지난해 기준 1억9,720만스위스프랑(약 2,355억원)이며 여느 국제기구처럼 최대 돈줄은 가장 많은 기부금(11.382%)을 내는 미국이다.

WTO의 최고 의사결정기관은 각료회의다. 하지만 각료회의가 2년마다 열리는 비상설기구이기 때문에 통상 현안은 일반이사회에서 논의한다. 무역분쟁에 휘말린 회원국이 WTO에 제소하면 분쟁해결기구(DSB) 패널이 꾸려지고 심리를 거쳐 1심 판정이 나온다. 제소국이 불복해 상소하면 7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상소기구가 2심 최종 판결을 내린다.


설립 이래 570건이 넘는 분쟁을 맡으며 세계무역질서를 지켜 온 WTO가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미국 대선이 치러진 2016년 무렵부터다. 대선 당시부터 “WTO는 재앙”이라며 미국의 탈퇴를 주장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 이후에도 틈만 나면 WTO에 대한 비난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4월에는 트위터에서 “엄청난 경제대국인 중국은 WTO에서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돼 굉장한 특혜를 받는다”면서 “WTO는 미국에 공정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가 실제로 탈퇴를 저울질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6월 잔류 뜻을 밝히며 탈퇴 논란은 일단락됐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를 무기처럼 휘두르면서 WTO의 존립 위기는 계속되고 있다. 무역장벽 철폐를 사명으로 삼은 WTO 규율을 무시한 트럼프 정부의 잇단 관세 폭탄과 그에 대한 중국·유럽의 보복조치로 무역시장이 걷잡을 수 없이 혼탁해지는데도 WTO가 중재는커녕 제대로 된 목소리도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올 6월 관세를 무기로 멕시코로부터 불법 이민방지 협상을 이끌어내는 등 외교 문제에까지 관세 카드를 들이밀며 WTO를 더욱 난처하게 만들었다. 파스칼 라미 전 WTO 사무총장은 “이민자를 막으려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생각은 WTO 정신에서 몇 마일은 떨어져 있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자유무역의 선봉장을 자처했던 미국이 앞장서 보호무역주의를 퍼뜨리자 다른 무역대국들도 WTO가 수호하는 자유무역질서를 외면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일본은 지난해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판결이 나온 후 ‘상품 수출에서 금지나 제한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WTO 원칙을 깨고 4일부터 한국의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소재에 대한 수출규제에 나섰다. 5월에는 WTO 상소기구가 후쿠시마 수산물 분쟁에서의 1심 판정을 깨고 한국의 손을 들어주자 한국산 수산물 검사를 강화하는 등 무역보복을 벌이고 있다.

미국에 맞서 자유무역 사수를 주장하는 다른 선진국들 역시 실제로는 무역시장의 주도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 보호무역으로 경도되는 것이 현실이다. WTO는 최근 보고서에서 G20이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5월까지 20개의 새 규제를 도입한 결과 무역시장이 3,359억달러에 달하는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게다가 무역전쟁으로 통상분쟁과 상고가 급격히 늘고 있지만 WTO는 제대로 된 인력도 갖추지 못한 채 허수아비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최대 지분을 보유한 미국이 WTO 상소기구가 분에 넘치는 권력을 휘두른다며 후임 위원 선정을 거부하는 ‘고사 작전’을 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상소기구는 2017년 이후 공석이 된 4명의 후임자가 없는 상태에서 3인 체제로 유지되고 있다. 3명이 한 분쟁을 심리하는 구조상 아직은 기구 유지가 가능하지만 2명의 임기가 올해 말 끝나면 내년부터 상소기구는 ‘식물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 지난해 유럽연합(EU) 등이 상소기구 위원을 9명으로 늘리고 위원 임기를 4년 중임제에서 6~8년 단임제로 바꾸자고 제안했지만, 미국의 협조를 얻지 못하는 상태에서 WTO는 사실상 ‘마비’ 수순을 밟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지난해 미국이 후임자 인선을 계속 가로막자 “미국의 거부로 분쟁 해결 시스템이 마비된다면 23년간 보호 무역을 저지했던 WTO는 끝나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창영기자 kc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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