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에 가까운 국내 4년제 대학교에 물리학·화학·수학·생물학 등 자연계열 기초 학과가 단 한 개도 존재하지 않는 현실은 생태계 붕괴 위기에 처한 국내 기초과학계의 민낯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기초과학 학문의 미설치율이 절반에 가깝고 국가 지원도 첨단 유행 학문에 집중되면서 기초과학 학문의 경쟁력은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기초과학 관련 학과는 전국 4년제 대학 대부분이 개교 초기부터 개설해 운영해왔을 정도로 이과계 학문의 뿌리에 해당한다. 하지만 지난 1990년대 후반 이후 특성화 및 융합 교육이 화두로 떠오르고 2000년대 이후 취업난 등이 겹치면서 급격히 세가 줄었다. 핵심 소재 확보는 물론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기술 선도를 위해서도 기초과학 학문의 중요성이 재차 강조되고 있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가고 있는 셈이다.
대학 60% 수학·생물 등 미설치
융합교육·취업난 겹치면서 급감
정부 특정 사업 지원정책도 한몫
실제 관련 조사에서 학과별로는 물리 관련 학과가 서울 16개, 수도권·지방 31개 등 47개 대학에서만 운영돼 미설치율이 73.9%로 가장 높았다. 화학 관련 학과 개설 대학도 서울 22개, 지방 37개에 그치는 등 화학·수학·생물학과의 미설치 비율이 모두 60% 이상이었다. 특히 이런 수치는 전자바이오물리학과·나노전자물리학과 등 기초학문과 융합된 성격의 학과까지 모두 포함된 결과다.
이런 가운데 국내 기업들도 석박사 채용을 꺼리면서 인재들이 갈수록 국내 석박사 과정을 외면하며 대학의 연구 기반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최근 국제학술지 네이처가 2018년 논문 게재 등 연구 성과를 합산해 점수로 변환한 결과 한국은 1,304점에 그치며 2위인 중국(1만1,025.51)의 10분의1 수준에 그쳤다. 기관별로는 중국과학원(CAS)이 1위를 차지한 반면 한국의 서울대, KAIST는 각 68위, 73위에 불과했다.
특정 사업 위주로 지원하는 정부의 과학계 지원 정책도 재정에 목마른 대학들이 유행 학과 설치에만 열을 올리게 되며 기초학문의 시스템 붕괴에 사실상 일조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과학 분야 지원 사업은 인공지능(AI) 대학원, 소프트웨어(SW) 중심 대학, 빅데이터, 블록체인, 스마트강판 등 최첨단 융합 학문에 집중돼 있다. 특정 사업에 선발돼 자금 지원을 받으려면 해당 학과 등을 개설해야 하고 확보된 자금은 해당 학과의 운영을 위해서만 써야 한다. 교육부 지원사업인 학술연구지원사업 등은 이공계와 인문계를 약 6대4 비율로 지원하지만 모든 단과대 전반이 대상이며 특정 분야에 대한 지원사업은 현 정부 들어 배제된 상태다.
“희망자 적어” 미운영 고교 허다
이과계 학문 접근 기회 사라져
과학교육의 부재는 비단 대학만의 일은 아니다. 일반고교에서 물리Ⅰ·Ⅱ 등 해당 학문의 기초 과정을 배울 수 있지만 희망자가 적거나 전공 교원이 부족하다는 이유 등으로 심화 수업인 물리Ⅱ·화학Ⅱ 등은 운영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때문에 물리Ⅱ를 배우지 않고 물리 관련 학과에 진학하는 사례가 빈번해 서울 상위권 대학에서도 이공계 대상 기초 보충수업은 필수 코스로 자리 잡은 지 오래고 일부 학생들은 과외까지 받고 있다. 선택과목을 다양화한 2015 개정교육과정에서도 문·이과 장벽을 없앤다는 이유로 학과별 필수 이수과목에 대한 논의는 생략돼 서울 주요 대학들이 이공계열 지원 시 수학·과학에 필수 이수 과목을 지정하는 방안을 도출해내기도 했다. 하지만 새 교육과정에 따라 중하위권 대학으로 갈수록 이공계 진학 시 수학·과학의 심화 학습을 요구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돼 기초 과학학문에 접근할 기회가 차단되고 전반적인 학습 수준은 더욱 저하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학 교수는 “학생들이 이과계 학문에 호기심을 느낄 기회가 차단되고 있다는 게 가장 심각한 문제”라며 “과학교육 및 과학지원 시스템 전반에 재검토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김희원기자 heewk@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