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관 ‘시현하다’ 김시현 작가. / 촬영 = 레코더즈
“증명사진 배경은 꼭 흰색이 아니었어도 됐어요. 그동안 아무도 증명사진에 대한 규정을 들여다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하얀 배경, 검은 정장, 어색한 미소…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왜 우린 그동안 판에 박힌 증명사진을 찍어왔던 걸까. 이런 의문을 처음 제기한 ‘아웃사이더’ 포토그래퍼가 있다. 하얀 배경을 치우고 그 자리에 피사체의 분위기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색을 골라 입혔더니 피사체의 표정과 개성이 한껏 살아났다. 흔해 빠진 증명사진이 하나의 작품으로 승화하는 순간이다.
사진관 ‘시현하다’를 꾸려가는 김시현(27) 레코더즈 대표작가와 그의 문하생들이 촬영한 1만 여명의 ‘초상(肖像)’들은 저마다 독특한 분위기와 색채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자신을 표현하는 게 중요한 요즘 젊은이들에게 ‘꼭 촬영가고 싶은 사진관 1순위’로 꼽히는 이유다. 그가 담아온 ‘대중의 초상’은 국내를 넘어 해외 전시에도 초대될 만큼 주목받는다. 지난달에는 ‘시현하다’의 팬클럽도 생겨났는데, “촬영하는 순간 자체가 즐겁고 기억에 남았다”는 후기가 인상 깊다.
스마트폰을 이용한 사진 촬영이 무척이나 흔해진 지금, 사람들이 굳이 그의 사진관에 찾아가 증명사진을 남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울경제는 최근 서울 강남구 시현하다 사진관(레코더즈 본사)을 찾았다. 사진관 건물은 언덕 위 골목 안쪽의 한 단독주택이었다. 대문을 지나 몇 개의 계단을 오르면 앞마당이 보이고 나무들 사이로 입구가 보이는 빨간 벽돌 2층 집, 그곳에서 만난 김시현 작가의 첫인상은 미디어에서 먼저 보고 가늠했던 것 이상으로 ‘포스’가 느껴졌다.
서울 강남구 ‘시현하다’ 사진관 본점 전경. / 강신우 기자
“그냥 찍는 거 아냐?” 무시 받았던 증명사진 촬영 |
시현하다가 담은 증명사진들. 피사체의 분위기를 배경 컬러로 나타내는 것이 특징이다. 사진들 중 두 명은 김시현 작가 본인 사진이다. / 레코더즈 제공
Q. 사진관 공간이 인상적입니다.
돈이 모이는 대로 조금씩 만든 게 이 공간이에요. 올해 2월에 이사했죠. 누군가의 지갑 속, 누군가의 집에 평생 걸리는 사진들을 촬영하고 싶은 사진가다 보니까 집이란 공간에서 촬영을 하게 되면 사람들이 조금 더 편안하게 느끼시지 않을까 해서 단독주택을 알아보게 됐어요. 책상 배치부터 디자인까지 모두 제 손을 거쳐 다듬어진 곳입니다. 손님들도 친구 집 놀러 온 기분으로 편하게 올 수 있다는 말씀들 해주시고 잘 즐겨주시는 것 같아요.
Q. 누구나 처음은 어렵잖아요. ‘시현하다’의 시작은 어땠나요?
제가 사진을 전공했는데, 증명사진을 작업으로서 표현하고자 했을 때 다들 무시하는 거예요. 증명사진은 그냥 도장 찍듯 찍는 것 아니냐고. 스튜디오를 차려도 연예인을 찍어야 성공한 사진가로 인정받는 거죠. 제가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동네 사진관을 차린다고 하니 어땠겠어요.
아니, 증명사진 찍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데. 누군가를 앉혀놓고 배경 색과 그 사람 하나만 가지고 그 사람의 분위기를 표현하라는 과제가 늘 주어지는 거잖아요. 솔직히 연예인들은 누가 찍어도 잘 나올 텐데. 일반 사람들을 대상으로 촬영하고 만족하며 가실 수 있게 하는 게 저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3년 동안 정말 하루도 안 쉬고 일만 했던 것 같아요.
빨간 벽돌 집에는 김시현 작가를 포함한 레코더즈 포토그래퍼들의 작업 공간이 나뉘어져 있다. 각 방마다 조금씩 다른 증명사진의 세계가 펼쳐진다. / 촬영 = 레코더즈
Q. 지금까지 몇 명을 촬영했나요?
얼마 전 세어봤더니 제가 촬영한 게 6,000명 거의 넘어섰어요. 요즘은 제자들 교육에 더 치중하다 보니 제 촬영은 많이 줄었고, 지금 저와 함께하고 있는 제자들이 더 많이 찍고 있는데도 벌써 그렇게 됐더라고요. 제자들 작업까지 다 합치면 1만 명도 넘을 거예요.
Q. 어떤 손님들이 오시나요.
40번 온 언니도 있고 30번 넘게 온 사람도 있고 다양해요. 제주에서 당일치기로 오는 친구들도 있고 홍콩에서 왔다가 사진만 찍고 하루 만에 가는 사람도 있고. 자기 얼굴에 마비가 있어 평생 사진 한 장 못 찍고 있다 여권도 못 만들어 해외에 한 번도 안 나가본 분도 계시고. 엄마랑 딸이 와서 엉엉 울다 간 친구도 있고요.
Q. 요즘 ‘셀카’ 정말 많이 찍는데, 굳이 시현하다를 찾아오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저희가 말하는 증명사진은 ‘초상사진’에 가까워요. 이제껏 사진관에서 초상사진, 프로필 사진이란 연예인이나 배우 지망생들, 독주회 준비하는 연주자들 분들만 찍어왔던 거잖아요. 일반 대중이 사진관에서 프로필 사진을 찍는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그런 개념을 저희가 만들어가면서 누구든지 자신이 주인공이 될 수 있고 자신의 인생을 기록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누군가가 정말 평생 간직할 수 있는 사진을 찍어주는 것, 스마트폰 셀카처럼 가볍게 소비되지 않고, 간직되는 사진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색은 무엇인가요? |
김시현 작가의 작업 공간. / 강신우 기자
나의 색은 무슨 색일까? 기자도 한참을 고민해봤지만 쉽게 결정하진 못했다. / 강신우 기자
Q. 사진 배경색은 총 몇 가지인가요?
몇 가지 색을 정해놓고 찍지는 않아요. 세상엔 정말 수천, 수만 가지 색이 있잖아요. 사람도 누구나 다 고유의 색이 있다고 생각해서 사람마다 세세하게 잡아가고 있습니다. 저도 색에 대한 이해도가 점점 높아져서 갈수록 색감이 더 풍부해져요.
Q. 배경색 선정 과정이 궁금합니다.
우선 본인 색깔이 무엇인지 고민해보시라는 숙제를 드려요. 자신이 어떤 이미지로 기억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비추어지고 싶은 지 묻는 거죠. 대부분은 많이 생소해 하시더라고요.
Q. 사진들을 보고 든 생각이, 어깨 라인이 수평이 아니더라고요. 보통 증명사진에선 그런 게 중요한데.
꼭 대칭일 필요는 없잖아요. 오히려 그런 연출이 훨씬 더 분위기가 자연스러워요. 사진관에서 찍는 가장 기본인 증명사진도 더 재미있을 수 있고 특이할 수 있고, 누군가가 자신의 개성을 보여줄 수 있는 안 뻔한 사진을 만들 수 있는 거죠. 사진이라는 매체는 한 장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매체라고 생각을 해서, 돈을 더 추가하신다고 해도 원본 B 컷은 안 드리거든요. 그 한 장이 그 사람의 모든 ‘아이덴티티’가 들어가는 그런 이미지를 연출하고 싶습니다.
Q. 보정 과정에도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하셨죠.
평소 ‘꼭 원본 사진이 나는 아니다’라고 말씀드려요. 우리가 이렇게 사람을 눈으로 보거나 이야기를 나눌 때, 우리가 정지된 장면을 보는 게 아니라 아침, 점심, 저녁 다 다르고 조명에 따라 다 다르잖아요. 그러니 125분의 1초로 찍은 초고화질 사진 한 장이 꼭 내 모습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는 거죠.
Q. 손님을 대하는 특별한 비결이 있다면?
‘시현하다’가 왜 이렇게까지 사랑받을까 생각해보면 결국 ‘대화’였다고 생각해요. 의외로 많은 분들에게 사진관이라는 공간이 너무 무섭고 두렵고 가기 싫은, 억지로 찍는 공간으로 남았더라고요.
사진가들은 보통 자기 작품 뒤에 숨어있는 존재인데, 저를 찾아오시는 분들은 내가 누구한테 찍히는 지 알고 누구랑 얘기하는 지 아니까 내적 친분을 갖고 방문하시는 것 같아요. 얼굴에 드러난 장애나 상처 같은 콤플렉스까지도 대화를 통해 밖으로 꺼내 말할 수 있고, 또 신중하게 그런 모습들까지도 다뤄줄 수 있는 사진가가 있다는 게 크게 와 닿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시현,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들 |
시현하다 사진관 입구. 손님들은 친구 집에 놀러가는 기분으로 사진관에 방문하곤 한다. / 촬영 = 레코더즈
유튜브에서 엿볼 수 있는 김시현 작가 일상. / 썸네일 캡처
Q. 레코더즈라는 회사를 꾸리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혼자였죠. 작업실도 없어 선배들 작업실, 렌탈 스튜디오 다니면서 돈 받고 촬영해드리고 그걸로 렌탈비 내고요. 사진으로 제가 점차 알려지다 보니 이제는 스스로 번듯하게 서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비슷한 컨셉의 사진관도 많아지고, 더 큰 자본으로 똑같은 컨셉으로 찍는 사진관도 생기니 불안감이 커졌죠.
제가 더 커지지 않으면 내 노력들을 다 빼앗기겠구나, 라는 생각이었어요. 회사를 만들고 브랜드를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죠. 이제는 제자들도 배우고 있으니 그들에게도 비전을 주고 싶고요. 좋은 포토그래퍼들이 모여있는 ‘기록가들’이라는 이미지로, 브랜드로 사람들에게 다가갔으면 해서 ‘레코더즈’라는 법인을 지난해 말 설립했습니다.
Q. 제자들은 어떻게 모이게 됐나요?
모두 7명 있어요. 최근에도 문하생을 모집했는데 백 명 넘게 지원하시더라고요. 대부분 사진 전공 아닌 분들이 더 많이 지원하시는 것 같아요. 상담하는 친구도 있고 디자인 전공이었던 친구도 있고.
Q. 남다른 발탁 기준이 있을 것 같네요.
이번에도 3차 면접까지 보고 했지만, 공감능력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오신 분들께 항상 좋은 에너지를 줄 수 있고 좋은 추억을 남길 수 있도록. 같은 말이라도 예쁘게 하는 능력이 중요해요. 말 한마디로 어떤 사람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얼굴의 상처도 그 사람이 자기 개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꼭 대칭이 예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진가들을 키우려고 합니다.
Q. 앞으로 또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요즘 드는 생각은, 조금 더 ‘시현하다’의 메시지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는 거예요. 제가 해온 일의 가치, 문화를 만들었던 부분보다 제 작업을 두고 ‘얼마짜리’ 라는 메시지가 던져지니까 되게 어렵더라고요. 이제는 회사가 많이 커졌으니까 제가 조금 더 마음을 크게 먹고 사진가로서, 사진관 언니로서 제가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하려고요. 저를 죽이는 연습을 지금 많이 하고 있어요.
Q. 자신을 죽인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나’ 라는 한 명으로 ‘시현하다’ 브랜드가 휘청거리지 않게 하는 거죠. 많은 친구들이 같이 있는 공간으로서, 같이 활동할 수 있게 스스로를 많이 놓는 중이에요. 제자들이 크게 자랄 수 있게요. 저 혼자가 아니라 저 같은 사진가들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Q. 고민도 많이 되시겠네요.
제 꿈은 그냥 동네 사진관 언니였거든요. 그 동네를 꽉 잡고 있는, 누군가가 늙어가는 과정을 같이 기록해줄 수 있는 그런 사진가를 꿈꿨는데…이게 참 무서운 것 같아요. 이제는 사진관 그 이상을 넘어서서 더 큰 꿈을 만들어가야 하는 상황이거든요. 그래도 그런 부담과 압박이 저에게는 정말 좋은 자극이 돼요.
사진관에 팬클럽이? 사진관 문화를 바꾸다 |
시현하다 팬클럽 카페 캡처
시현하다 사진관 포토존. 다소 긴장한 채 방문했을 손님을 위해 사진관 내부를 편안히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두었다. / 강신우 기자
Q. 최근 팬클럽도 만들어졌던데, 어떻게 된 건가요?
저희 사진관에 한 20번은 온 친구가 만든 거예요. 그 친구가 처음에는 자신이 자존감이 되게 낮았대요. 여기서 사진을 찍다 보니 자신이 온전히 주인공이 되어서, 자기를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 너무 즐겁다면서 계속 오더라고요. 최근에 시현하다 사진 전시회를 할 때 일인데, 본인 사진이 걸린 친구들이 전시에 와서 서로를 보면서 “저 인스타그램에서 사진 봤어요” 라면서 자기 사진을 교환하고 자기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런 문화가 너무 즐겁고 재미있는 경험이라면서 커뮤니티까지 만들게 된 거죠. 정말 신기했어요, 일개 사진관이 팬클럽이 생긴다는 게. 세상에 이런 사진관 문화가 있는 곳은 아마 우리나라밖에 없을걸요?
Q. 꽤 유명해졌는데, 변화를 체감하시나요?
10번 넘게 왔던 단골 손님이 지방에 똑같은 사진관을 차렸더라고요. 소품부터 사진 스타일 똑같이. 그런데 저는 이 촬영 문화를 조금 더 발전시키는 게 제 목표였어서, 도가 지나치지 않는 이상은 크게 신경 쓰진 않아요. 사진관 아저씨들이 기계적으로 ‘다음, 다음’ 하면서 찍던 그 문화에서 피사체에게 애정을 갖고 찍어주는 것으로 한국 사진관 문화가 많이 바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컬러 배경으로 증명사진 찍는 것도 이제는 낯설지 않게 된 것 같아요. 적어도 제가 한국의 증명사진 문화에 한 획은 긋지 않았을까요? 하하.
김시현 작가의 다양한 증명사진 모습. / 레코더즈 제공
Q. 손님들에게 묻는 질문, 제가 대신해보겠습니다. 김시현 작가의 색은 무엇인가요?
손님들 보면 매번 같은 색 배경, 옷 스타일로 찍는 분도 있고. 매번 팔색조처럼 다른 색에 도전하는 분들도 있고요. 제 사진들 보면 항상 색이 바뀌어요. 저는 다양한 색인 사람이고 싶어요.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시현하다’가 주는 메시지는 결국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시현하다’를 통해서 자기 인생의 주인공은 자기라는 걸 꼭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강신우기자 see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