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제2차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1933년 2월 20일, 스물네 명의 그림자가 국회 의장 궁전으로 걸어 들어갔다. 히틀러와 괴링을 만나는 자리다. 당시 거대 군수 기업을 이끌던 크루프를 비롯해 오펠, 지멘스 등 익숙한 이름의 사람들이 그들 중 하나다. 영국 추밀원 의장 핼리팩스는 독재자 히틀러를 시종장으로 착각하는 실수를 범했다. 정신병원에서 그림을 그린 화가 수테르도 등장한다.
지난 1903년 제정돼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으로 명성을 이어온 2017년 공쿠르상 수상작인 에리크 뷔야르의 ‘그날의 비밀’이다. 150쪽에 불과한 짧은 소설이지만 프랑스에서만 42만 부가 팔렸고, 30여 개국에서 번역 계약이 이뤄졌다. 책을 집어들기 전, 저자의 전작들을 알 필요가 있다. 스페인 정복자들을 다룬 ‘콩키스타도르’. 1차대전을 소재로 한 ‘서쪽의 전투’를 비롯해 서부 개척시대, 프랑스 혁명 등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다. 모조리 역사적 사실에 기반했다. 저자가 자신의 작품을 소설이 아닌 ‘이야기’라 부르는 까닭이다.
시대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비밀’에는 외교 협상이나 전투 등의 장면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저자의 관심사가 역사의 주연보다는 사건에 휘말렸던 조연에 쏠렸기 때문이다. 히틀러나 괴링 같은 정치인의 뻔뻔함보다는 강제 수용소에서 노동력을 착취해 군수기업을 경영한 크루프사의 무덤덤함이 부각된다. 전범 기업의 역사적 과오가 해결되지 않은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 과연 이게 소설인지 옛이야기인지 자주 헛갈리게 된다.1만2,800원.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