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환율시장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백악관 경제 참모의 공식 발언을 몇 시간 만에 뒤집으며 환율개입 가능성을 시사했다. 글로벌 경기둔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각국이 경쟁적으로 통화완화 정책을 펴고 있는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이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기준금리 결정을 앞두고 또다시 ‘약달러’에 대한 집착을 보인 것이다. “2초면 시장에 개입할 수 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내년 대통령선거와 교착상태에 빠진 미중 무역전쟁, 글로벌 경제의 성장 둔화를 고려한 것으로, 시장에서는 미국발 환율전쟁 발발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26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오후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달러 강세에 대한 조치를 배제하기로 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나는 그것(시장개입)을 2초 만에 할 수 있다. 나는 뭘 안 하겠다는 말은 안 했다”고 밝혔다.
이는 앞서 이날 오전 래리 커들로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이 미 경제방송 CNBC에 출연해 “우리의 원칙은 환율시장 개입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밝힌 데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반응이다. 커들로 위원장은 이날 트럼프 정부가 약달러 정책을 갖고 있느냐는 질문에 “그건 오해”라며 “트럼프 대통령이 걱정하는 것은 일부 국가가 환율을 조작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주 대통령과 회의를 했다”면서 미국의 환율개입 가능성을 일축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몇 시간 만에 정면 부인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커들로가 달러화 약세를 위해 개입할 가능성을 배제한 지 몇 시간 만에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끼어들었다”며 “트럼프의 통화정책은 그의 무역전쟁만큼이나 혼란스러워 보인다”고 지적했다.
취임 후 트럼프 대통령은 줄곧 약달러를 주장해왔다. 달러화 약세는 미국의 수출 증가와 무역적자 해소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에도 이를 위해 중앙은행인 연준에 기준금리 인하를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한편 트위터를 통해 “중국과 유럽이 미국과 경쟁하기 위해 대규모 환율조작 게임을 하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시장에서는 글로벌 경기둔화에 따른 주요국 중앙은행들의 통화완화 정책이 달러화 약세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열망을 부추기고 있다고 보고 있다. 경기둔화에 시달리는 유럽의 경우 지난 25일 유럽중앙은행(ECB)이 금리 인하를 포함한 양적완화 재개를 시사했다. 터키는 최근 기준금리를 24%에서 19.75%로 4.25%포인트나 인하했다.
이런 상황에서 연준이 오는 30~31일로 예정된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시장의 예상대로 0.25%포인트 수준의 기준금리 인하를 단행하면 사실상 주요국 간 환율전쟁이 본격화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최근 알리안츠글로벌인베스터는 연준의 금리 인하를 기점으로 세계가 비공식적인 환율전쟁 시대를 맞이했다고 진단한 바 있다. 세계 최대 채권운용사인 핌코도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 속에 미 연준의 금리 인하 폭이 예상보다 커질 경우 다른 중앙은행들의 경쟁적인 통화완화를 부추기면서 전면적 환율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여기에 미국의 경기둔화도 트럼프가 달러 약세에 관심을 갖게 하는 요소다. 미국의 올 2·4분기 성장률은 2.1%로 시장 전망치를 웃돌았지만 1·4분기보다 1%포인트나 떨어졌다. 이달 초 있었던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분야별 국정수행 지지도 조사에서 경제정책만 51%로 유일하게 찬성 응답이 더 많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는 약달러를 통해 경기둔화 속도를 늦춰야 내년 선거에 승산이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때문에 월가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양적완화 정책 이외에 직접적인 시장 개입을 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내놓고 있다. /뉴욕=김영필특파원 susopa@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