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 지위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의해 흔들리면서 농가 소득보전을 위한 보조금 중심의 농업정책 운용에 대대적인 전환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개도국 지위를 상실하면 농업 분야에 대한 기존 국내 보조금 정책 운용에 제약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농산물 가격이 하락했을 때 정부가 물량을 사들여 가격을 지지하는 형태의 정책에 제약이 생기는 것이다.
29일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정부는 올해 초 WTO에 2012~2015년(신규 통보분) 감축대상 보조금(AMS) 지급 실적을 알리면서 2015년 473억원을 지급했다고 통보했다. WTO 규정상 정부가 지급할 수 있는 보조금에 한도가 있는데, 우리나라는 농업분야에서 개도국 지위를 인정받아 1조4,900억원까지 지급 가능하다. 쌀값이 일정 기준 밑으로 떨어졌을 때 농가에 지급하는 변동직불금이 대표적인 감축대상 보조금에 해당한다. 지난 2011~2014년까지는 감축대상 보조금 지급 실적이 ‘0’이었다.
지난 2014년과 2015년 쌀 변동직불금이 각각 1,941억원과 7,257억원 지급됐음에도 감축대상 보조금 지급 실적이 미미한 것은 개도국 지위로 받은 최소허용보조 10% 기준 덕이다. 보조금 지급 규모가 전체 품목 생산액의 10%에 미치지 못하면, 지급한 보조금 전액이 지급 실적에 잡히지 않는다. 앞선 2009년과 2010년 변동직불금이 각각 5,945억원과 7,501억원 지급됐음에도 감축대상 보조금 지급 실적이 285억원과 137억원에 그쳤던 것도 이 때문이다.
문제는 개도국 지위를 상실할 경우다. 정부는 “우리가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더라도 보조금 규모에 변화가 없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1조4,900억원인 한도가 약 8,000억원 수준까지 낮아질 것이라는 게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추정이다. 이는 2008년 논의가 중단된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안(案)을 근거로 했다. 최소허용보조도 10%에서 2.5%로 4분의1 토막 난다. 지금 당장 감축대상 보조금 지급 실적이 한도인 1조4,900억원에 크게 못 미쳐 여유가 있어 보이지만, 개도국 지위를 상실할 경우 직불금 제도 운영에 막대한 차질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실제, 쌀값 하락으로 지난 2017년 1조4,894억원 규모 변동직불금 지급이 발동되자 감축대상 보조금 한도를 넘어서면서 직불금 일부가 지급되지 못했다. 서진교 대외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쌀 가격 변동에 따라 직불금 규모가 얼마나 커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WTO 규정에 막혀 국내 직불금 제도를 제대로 운용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감축대상 보조금에 해당 될 수 있는 가격·생산과 연계되지 않은 인센티브 형태의 정책이 확대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임정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WTO 규정상 감축대상 보조금이 아닌, 허용대상 보조금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정책적 대비를 해야 한다”면서 “단순히 농가 소득을 지원하는 형태보다 지역 균형발전, 생태 보존 차원의 농가 인센티브를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전문가는 “정부가 도입을 추진 중인 공익형 직불제가 감축보조에 해당하지 않도록 가격, 생산과 연동되지 않은 형태로 보다 세밀하게 설계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세종=한재영기자 jyha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