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허진호 감독 "기차서 뛰어내리듯 대기업 사표...'삶의 명암' 담은 영화 남기고 싶어"

■7년째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이끄는 '멜로거장' 허진호 감독
철학과 졸업 후 전자회사 1년 6개월 다니다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 싶어 미련없이 나와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외출' 등
20년간 충무로 '멜로 장인'으로 자리매김
8일 개막 '제천영화제' 집행위원장 맡아 지휘
지구촌 곳곳서 온 127편의 음악영화 상영
"호숫가 풀벌레 소리·선율 공존...벌써 기대"

허진호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집행위원장.

허진호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집행위원장.


“지난 20년간 충무로의 멜로 영화는 결국 허진호였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이 말만큼 허진호(56·사진) 감독이 이룬 성과를 명쾌히 요약하는 평가도 드물다. 지난 1998년 ‘8월의 크리스마스’로 데뷔한 허 감독은 ‘봄날은 간다’ ‘외출’ ‘행복’ ‘호우시절’ 등을 차례로 내놓으며 멜로 영화의 장인으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작품들은 ‘사랑 영화’의 외피를 입고도 관객의 눈물을 쥐어짜는 관습적인 공식과 결별하면서 생(生)의 희열과 유한성을 담담히 노래했다. 이후 중국 배우들과 함께 시대극 ‘위험한 관계’를 만든 다음 정통 사극 ‘덕혜옹주’로 55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면서 흥행 감독의 자질을 입증하기도 했다.

한두 편만 찍고 쓸쓸히 퇴장하는 경우가 다반사인 충무로에서 그는 20여년 동안 꾸준히 장편영화를 만들어왔다. 그런 그가 영화 연출 외에 2013년 이후 해마다 의욕적으로 매달리는 일이 하나 더 있다. 햇살은 뜨거워지고 가로수들은 싱그러운 녹색 빛깔로 반짝이는 8월이 오면 충북 제천의 호숫가에서 열리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와 관련한 업무다. 허 감독은 2013년부터 이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을 맡아 벌써 7년째 행사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15회를 맞은 올해 영화제는 오는 8일부터 13일까지 개최된다.

최근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에 있는 영화제 서울 사무국에서 만난 허 위원장은 그의 영화를 쏙 빼닮은 사람이었다. 차분하고 고요한 목소리,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에서 연애와 일상의 빛나는 순간을 포착한 그의 영화를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허 위원장은 “원래 일희일비하는 성격이 아니라 특별히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없이 지내는 편인데 영화제 기간만 다가오면 마음 상태가 달라진다”며 “제천의 호숫가에서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영화와 음악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개막식이 임박하니 가슴이 설렌다”고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 동지이자 2006~2011년 영화제 집행위원장을 역임한 조성우 음악감독에게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이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허 위원장의 연세대 철학과 동기이기도 한 조 감독은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를 비롯해 50여편의 장편영화에 아름다운 선율을 입힌 영화음악가다. 허 위원장은 “처음에는 정해진 임기 2년을 채우면 그만둘 것이라 생각하고 시작했다”고 돌이켰다. 그러면서 “막상 해보니 영화인과 음악인·일반 관객 등 다양한 사람들이 영화제에 대한 호감을 표시해주더라”며 “아시아 최초의 음악영화제라는 정체성을 잘 유지면서도 국제적인 시네마 축제에 걸맞게 외연의 폭을 넓혀보자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허 위원장은 “초기에는 해외의 유명 영화인을 행사에 초청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며 “스태프들이 똘똘 뭉쳐 열심히 뛰어다닌 덕분에 출품작 숫자도 예년보다 50% 정도 늘었고 올해는 ‘완령옥’ ‘장한가’ 등을 만든 중국의 관진펑 감독처럼 유명한 게스트를 국제경쟁 부문의 심사위원장으로 위촉할 수 있었다”고 귀띔했다.


총 127편의 작품을 상영하는 올해 영화제에서 단연 눈에 띄는 프로그램은 ‘한국영화 100년, 시대의 노래’와 ‘사람의 체온을 담은 필름-고(故) 류장하 감독 이야기’다. 먼저 한국 영화 100주년을 기념하는 섹션에서는 ‘별들의 고향’ ‘고래사냥’ ‘라디오 스타’ 등 각 시대를 대표하는 충무로의 음악영화 6편을 선보인다.

‘사람의 체온을 담은 필름’은 2월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류장하 감독을 추모하는 프로그램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조연출을 담당한 류 감독은 ‘꽃피는 봄이 오면’으로 데뷔한 후 ‘순정만화’ ‘뷰티플 마인드’ 등을 발표했다. 올해 영화제는 류 감독의 작품 세 편을 모두 상영하고 11일에는 허 위원장과 조 감독, 김태훈 팝 칼럼니스트, 배우 최수영이 함께 류 감독을 회고하는 토크 콘서트 행사도 열린다. 허 위원장은 “영화 ‘꽃피는 봄이 오면’을 보면 만든 사람의 따뜻한 심성이 그대로 느껴진다”며 “좋은 사람이자 좋은 감독이었던 류 감독을 추모하기 위해 최민식·유지태·이연희 등 그의 작품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모두 제천으로 내려와 관객과 만나는 행사에 참여할 예정”이라고 소개했다.

지원금을 계속 늘리면서 음악영화 발굴에 일조하고 있는 ‘제천 음악영화 제작지원 프로젝트’도 허 위원장이 자부심을 드러내는 프로그램이다. 그는 “충무로에서 음악영화의 여건과 환경은 여전히 척박한 것이 사실”이라며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아우르는 음악영화를 꾸준히 지원하고 발굴해 한국 영화계의 자산을 좀 더 풍성하게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다”고 전했다.

‘영화인 허진호’가 아닌 다른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 만큼 데뷔 이후 많은 세월이 흘렀으나 어린 시절부터 허 위원장이 감독의 꿈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1989년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대우전자에 취직했다. 두 달마다 나오는 보너스의 유혹에 이끌려 1년6개월 동안 직장 생활을 하다가 문득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싶은 마음이 들어 미련없이 사표를 던지고 나왔다. 허 위원장이 당시 느꼈던 심정은 2009년 연출한 영화 ‘호우시절’에 그대로 담겼다.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인 동하는 젊은 시절 시(詩)를 사랑한 문학도였으나 현재는 평범한 대기업 직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동하는 중국 출장길에 만난 오랜 친구 메이가 “난 네가 시인이 될 줄 알았다”고 말하자 이렇게 답한다. “처음에는 잠깐만 직장을 다니려고 했었어. 첫 월급 타면 그만두고 다시 글을 쓰겠다고 생각했는데 다음 달 월급이 들어오고 또 승진을 하고…. 그러다 보니 점점 더 그만두기 힘들어지더라.”

허 위원장은 “영화 속 동하와 달리 정말이지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심정으로 사표를 썼다”며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더 해볼 생각도 있었는데 (영화진흥위원회가 설립한 교육 기관인) 영화아카데미의 시험 공고를 우연히 접하자 어릴 때부터 막연하게 갖고 있던 창작에 대한 동경이 되살아났다”고 회고했다.

영화아카데미에서 동료들과 졸업작품을 만들면서 영화감독의 길에 확신을 품은 허 위원장은 박광수 감독의 연출부를 거쳐 1998년 직접 각본을 쓴 ‘8월의 크리스마스’로 화려한 신고식을 치렀다. 허 위원장은 “직장을 그만둘 때 나이 서른을 목전에 두고 있었는데 돌이켜 보면 ‘서른’은 아무것도 아닌 나이였던 것 같다”며 “아카데미 시절까지 포함하면 영화를 시작하고 벌써 27년이 흘렀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2~3년에 한 편, 또는 3~4년에 한 편씩 작품을 드문드문 만들다 보니 무언가 익숙한 일을 한다기보다 늘 새로운 도전을 하는 느낌이 든다”며 “작품의 간격과 상관없이 영화감독의 일 자체가 익숙해져서 잘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고 덧붙였다.

자신이 이룩한 성취에 스스로 도취하는 대신 그저 앞으로 나아갈 길만 생각하는 이 거장의 유일한 꿈은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란다. “사랑도, 인생도 언제나 좋은 면과 나쁜 면이 공존하잖아요. 그런 우리 삶의 모습을 정직하게 담아내는 감독으로 관객들에게 기억되고 싶습니다.” /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사진=성형주기자

◇He is…

△1963년 전북 전주 △1989년 연세대 철학과 △1993년 한국영화아카데미 9기 △1998년 ‘8월의 크리스마스’ △2001년 ‘봄날은 간다’ △2005년 ‘외출’ △2007년 ‘행복’ △2009년 ‘호우시절’ △2012년 ‘위험한 관계’ △2016년 ‘덕혜옹주’ △2013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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