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코 히로시게 일본 경제산업상이 8일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국에 대한 3대 수출규제 품목 중 하나인 극자외선(EUV) 포토레지스트 수출을 허가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도쿄=AFP연합뉴스
일본 정부가 8일 반도체 핵심소재 수출규제를 강화한 지 한 달여 만에 처음으로 1건의 수출을 허가했다. 수출규제가 사실상 ‘금수 조치’가 될 것이라는 일각의 예상과 달리 강경조치는 일단 유보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추가 보복을 위한 성동격서 전략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다만 일본의 이번 조치를 두고 일본이 경제보복 수위를 낮출 것이라는 판단은 낙관적이라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산케이는 같은 날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개별허가 품목을 240개까지 확대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일본이 직접 공격보다는 다양한 카드를 한국 앞에 내밀면서 국내 불확실성을 키우는 전략으로 바꿨다는 분석이다. 한 통상 전문가는 “일본은 한국을 공격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하나하나 갖춰나가고 있다”며 “국제 여론을 봐가면서 필요에 따라 규제 수위를 조절하는 수도꼭지 전략으로 한국을 흔들겠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일본이 반도체 소재에 대해 한 달이 조금 지난 시점에 수출 허가를 내준 것은 예상 밖이었다. 정부와 업계는 일본이 3대 소재에 대한 개별허가를 시행할 경우 허가에만 90일가량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수출 허가 심사 89일째가 되는 날 심사를 반려하는 식으로 사실상 수출을 막을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았다. 일본이 숨을 고르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이뿐만 아니다. 일본 정부는 지난 7일 수출 절차 간소화 국가군인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배제하면서도 한국만을 겨냥한 개별허가 품목을 추가로 지정하지 않았다. 개별허가 품목을 추가로 명시해 한국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일 것으로 우려한 재계의 전망과 달랐다.
하지만 정부는 일본의 이 같은 행보에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일본이 언제든 한국을 향한 수출을 통제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다져놓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화이트리스트 배제로 일본은 전략물자뿐 아니라 비전략물자에 대해서도 한국으로의 수출을 제한할 길을 열어놓았다. 아직 일본이 어떤 품목을 추가로 제한할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일본 입장에서는 제도 변경 자체로 국내 기업에 불확실성을 키우는 효과도 거두고 있다. 신세돈 숙명여대 교수는 “어떤 품목을 개별허가 품목으로 지정해야 한국에 더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지 생각하고 연구하느라 이번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일 수 있다”며 “뭐가 됐든 일본의 큰 원칙은 우리나라로 수출하는 거의 모든 품목이 개별허가를 받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은 수위를 조절하는 모양새를 보이면서 한국의 공격을 무디게 하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 일본은 수출규제를 실시하며 한국과의 신뢰가 깨진 상황에서 군사 목적으로 전용할 수 있는 물품이 한국에 수출될 경우 문제가 있을 수 있어 관리를 강화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를 두고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당할 경우 궁지에 몰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둘러댄 억지논리라는 해석이 나왔다. 정부 역시 일본의 이번 조치가 정치적 목적에서 이뤄졌다는 점을 WTO에서 지적해 일본을 압박하고자 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번 반도체 소재 수출 사례 등을 추가로 모아 수출규제가 실제 수출관리 미비 때문이었다는 명분을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본의 이번 조치는 자국 기업의 피해도 일부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미중 무역전쟁이 격화하면서 일본의 수출 여건은 어두운 상황이다. 일본 재무성은 올 상반기(1~6월) 경상수지 흑자액이 전년 동기보다 4.2% 줄어든 10조4,676억엔(약 119조4,500억원)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이 가운데 무역수지 흑자액은 87.4%나 급감한 2,242억엔으로 집계됐다. 중국뿐 아니라 한국으로의 반도체 제조장치, 철강, 자동차 부품 수출이 크게 줄어든 탓이라는 게 일본 내부의 분석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일본이 수출규제 수위를 높여나갈 경우 국내 업체들이 다른 국가로부터 재고 확보에 나서면서 일본 업체의 매출이 줄어들 수 있다는 점을 고려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김우보기자 ub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