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치적 견해는 한국의 독립이지 자치 따위의 문제는 전혀 고려할 여지가 없다. 일본이 한국 독립을 승인하느냐 아니냐는 나로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략) 한민족 2,000만 민중의 마음을 귀순시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2,000만 민중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죽임을 당하기 전까지는 독립운동은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
1934년 12월 8일 중국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의 사법경찰관 후지 다다오 앞에서도 그는 굴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독립운동가 이규채(1890~1947)다.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강점기 중국으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과 한국독립당 선전위원, 한국독립군 참모장 등을 역임하며 평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가 일제 말기에 한 자 한 자손으로서 기록한 독립운동 연보와 일기, 각종 소송기록 등이 75년 만에 세상에 나왔다. 일제 강점기 근대 감옥과 수감자들을 연구한 ‘감옥사’ 전공자인 박경목 서대문형무소역사관장이 해제를 붙여 잘 알려지지 않은 항일투사의 독립운동 여정을 복원했다.
이규채는 1932년 9월 일제가 중국 침공의 교두보로 삼았던 하얼빈의 쌍성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한중 공동 항전의 첫 성과로 평가받는 전투에서 그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왼쪽 손에 총을 맞아 부상을 당하였다는 것을 알았다”고 썼을 정도로 몸을 사리지 않았다.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며 “다섯 살 난 아이가 수시로 밥 달라고 하는 것은 빈 젖을 물려서 달랠 수 있지만, 여덟 살 난 아이가 배고프다고 우는 소리는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고 미안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법원에서는 소신을 꺾지 않았다. 재판장이 가산면장인 형의 얘기를 꺼내며 묻자 이규채는 “내가 일본의 시정에 호의를 갖고 있다는 것과 조선의 독립을 열망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며 “형이 어떤 일을 하든지 나의 신념을 굽혀 그것과 동화하는 일은 전연 불가능하다”고 했고 징역 10년을 선고받은 뒤 1940년에 가석방됐다. 4만5,000원.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