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싸웠던 학도병들은 그를 ‘전술의 귀재, 생명의 은인’으로 여긴다. 최은오 예비역 대령의 회고. “형님이 아니었으면 다 죽었을 겁니다. 정말로 지혜로운 지휘관을 만난 덕에 산 거예요. 우리를 세 번은 살리셨어요.” 첫 번째는 화순 전투에서 부산 후퇴까지. 정 중위는 지형을 이용한 은폐·엄폐 장소와 참호 자리를 잘 골랐다. 기동할 때면 ‘내가 편하면 적도 편하다’며 산길을 돌고 병력을 분산해 움직였다. 최 예비역 대령은 “처음에는 가뜩이나 힘든데 중대장이 먼 길로 돌아서 다닌다고 불평했지만 곧 그것 때문에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두 번째는 제주도 하사관학교 입교. 덕분에 총알받이 신세를 면했다. 세 번째는 지리산 토벌작전. 학도병 출신 하사관들에게 “낮에 개울을 건너지 말고 산은 허리를 타고 움직이라”고 가르쳤다. 최 예비역 대령은 “다른 부대의 특공대는 대부분 전사했지만 형님 부대에서는 전공을 올리면서도 전사자가 없었다”고 말했다.
신설된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에서도 그는 명교관으로 이름났으나 진급과는 인연이 없었다. 동기생인 육사 8기생이 주도한 5·16 이후에는 더욱 차별당했다. ‘혁명 참여’를 거부한 탓이다. 고위직 본부장 자리를 마다한 적도 있다. 돌아온 것은 완전히 막혀버린 진급. 1955년 처음 만난 그의 아내가 아는 남편의 계급은 ‘중령’ 딱 하나다. 13년 동안 중령에 머물던 그는 1965년 군문을 떠났다. 한때 이민도 생각하다 광업공사에 입사했는데 웬일인지 십장부터 시켰다. 과장과 부장, 소장을 거치며 대형 탄맥을 찾아냈어도 임원인사에서는 또 막혔다. 훗날 다른 인연으로 보험회사 전무와 대형 문고 대표를 지냈지만 한창 아이들이 크고 교육비가 필요할 때는 조직적인 방해가 따랐다.
최 예비역 대령은 “고비 때마다 회유가 있었다”며 “‘제발 좀 한자리하시라. 나도 좀 따라다니게’라며 설득했으나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끝내 생각을 바꾸지 않으신 분”이라고 설명했다. 교관 시절 생도였던 집권여당 대표의 인사를 일부러 외면한 적도 있다.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영웅이지만 ‘자연인 정태경’의 노후는 유복한 편이다. 2남 2녀를 의사와 교수·박사로 키워냈다. 인터뷰에 동행한 한설 교수(한 교수는 육사 교관 시절인 1993년 ‘한국전쟁기 학도의용군’이라는 책을 통해 화개장터전투를 최초로 찾아낸 주역이다)가 “화개장터전투가 대한민국을 구했다”며 “예우가 미흡해 죄송하다”고 말하자 노병은 먼 산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용히 대화를 듣던 부인 최용란(87)씨는 “아이들 가르치고 저축도 할 수 있게 연금을 내준 나라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권홍우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