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가 현실 정치에 거리를 두는 왕실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문제로 혼란이 계속 가중되자 정치권을 이례적으로 비판하며 불편한 속내를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더 타임스는 11일(현지시간) 왕실 소식통을 인용해 “엘리자베스 여왕이 정치권에 대해 ‘제대로 통치를 못 한다’(inability to govern)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소식통은 신문에 “여왕은 정말 낙담한 것 같다. 현 정치계층에 대한 실망감과 제대로 통치하지 못하는 무능함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고 알렸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제임스 캐머런 전 총리가 지난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임한 직후 개인 행사에서 이 같은 불만을 전했지만 이후 비판의 목소리를 점점 크게 낸 것으로 전해졌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67년의 재임 기간에 현실 정치에 견해를 밝힌 적이 거의 없어 더 타임스는 이번 발언에 대해 여왕이 내놓은 ‘가장 혹독한 정치 발언’ 가운데 하나라고 평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브렉시트를 놓고 정치권의 무능력에 불만이 높아진 것은 자칫 왕실이 브렉시트 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야당인 노동당의 제러미 코빈 대표는 최근 ‘노 딜’ 브렉시트를 막기 위해서라면 정부 불신임안 제출도 불사하겠다고 밝힌 바 있지만 보리스 존슨 총리는 내각 불신임안이 통과되더라도 사퇴를 거부할 것으로 전해졌다. 총리가 정부 불신임안 가결에 꼭 사퇴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경우 여왕은 사퇴를 거부하는 존슨 총리를 사퇴시키고 새 총리를 임명해야 하는 불편한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영국 왕실측은 군주의 정치적 독립을 보호하기 위한 대응책 마련에 나서고 있지만 브렉시트를 둘러싼 논란이 영국 내에서 워낙 첨예하고 국제적 파장도 커 여왕이 구설수를 피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손철 기자 runiro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