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8월14일 ‘자동차 왕국’에서 번호판 부착에 대한 법령이 나왔다. 모든 자동차는 운전사 앞 전방 차대 왼쪽에 정한 규격대로 번호판을 달아야 한다고 명시한 것. 최초로 자동차 번호판을 의무화한 자동차 왕국은 어디일까. 미국이 아니라 프랑스다. 초기 자동차 산업 발전은 유럽, 특히 프랑스가 이끌었다. 내연기관을 1886년 발명한 카를 벤츠도 독일과 프랑스 특허를 같이 받았다. 프랑스는 20세기 초반까지 세계 자동차 생산의 절반을 차지하며 미국(세계 시장점유율 18%)보다 한참 앞서 나갔다.
다만 최초의 등록제과 번호판을 시행한 주체는 국가가 아니라 도시였다. 파리시 경찰청은 세 가지 목적에서 이 제도를 도입했다. 첫째, 아일랜드에서 1869년 최초로 발생했던 교통사고가 급증해 관리 필요성이 커졌다. 둘째, 자동차를 이용한 범죄가 늘어났다. 셋째, 시청과 재무부의 요청이 잇따랐다. 파리시는 처음에는 이름과 주소가 약어 형식으로 들어가고 숫자를 조합한 번호판을 쓰다가 지역명과 숫자를 섞는 방식으로 바꿨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번호판은 1896년 독일 각 지역에서 채택하고 1898년에는 네덜란드도 받아들였다. 네덜란드는 지방이 아니라 중앙정부에서 번호판 업무를 시작한 최초의 국가다.
대서양을 건넌 번호판은 미국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퍼졌다. 주별로 디자인이 다르고 개인이 원하는 숫자와 알파벳을 선택할 수도 있다. ‘7개 아라비아 숫자와 7개 알파벳이 필요하다’는 공통점도 있지만 미국의 번호판은 다양성을 중시하는 문화의 단면으로 꼽힌다. 우리나라에서 자동차 번호판이 등장한 시기는 1904년. ‘오라이(alright)자동차상회’가 전국 9개 승합노선을 허가받아 검은색 철판에 흰색 두 자리 숫자를 써넣은 게 시초다. 정부보다 개인사업자가 편의상 들여온 한국의 번호판은 다시금 변화를 맞고 있다.
오는 9월부터 새로 등록될 비사업용 및 대여사업용 자동차의 앞 번호가 기존 두 자리에서 세 자리로 변경된다. 지역명을 없애며 앞 번호에 두 자리를 도입한 지난 2005년 이후 자동차 보급이 크게 늘어 기존 체계로는 더 이상 발급할 번호가 거의 없는 탓이다. 앞으로 상당 기간 번호판 변경은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변경으로 무려 2억998만개의 여유가 생긴다고 하니까. 한편으로 걱정이 앞선다. 성장 둔화에 들어선 우리 사회가 이전 같은 자동차 보유 폭증세를 다시 볼 수 있으려나. 난망이다. 북한과 경제통합이 이뤄져 우리 번호판이 대거 쓰이는 날이 온다면 몰라도….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