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영화 벌새] 평범한 14세 소녀가 본 평범하지 않은 1994년

김일성사망·성수대교 붕괴 등
사건사고로 시끄럽던 한국사회
그속에서 점점 세상에 눈을 뜨는
중학생 은희의 성장 스토리 담아

영화 ‘벌새’ 스틸컷./사진제공=엣나인필름

새로 온 한문학원 선생님 영지(김새벽 분)는 칠판에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相識滿天下 知心能幾人)’을 적는다. 은희(박지후 분)는 모르는 한자를 ‘어쩌고’로 대체하면서도 끝까지 읽어내지만 뜻을 유추할 수 없다. 영지가 “서로 얼굴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가득하지만, 마음을 아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하고 뜻을 풀이해주자 은희는 마음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는지 잠시 생각에 잠긴다.

오는 29일 개봉하는 ‘벌새’는 14세 소녀 은희의 성장 스토리를 그린 영화다. 작품은 김보라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인 듯 보이지만 서울대에 가자고 합창하는 교실, 아버지의 일장 연설이 끝나야 밥을 먹을 수 있는 가족식사 등 세밀하게 그려낸 20여년전 한국사회의 모습은 마치 거울을 마주하고 있는 듯 우리의 이야기와 닮아 있다. 사랑받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았던 중학생 소녀는 주변 사람들과 관계 맺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서서히 사회로 걸어 나온다.


영화 ‘벌새’ 스틸컷./사진제공=엣나인필름

서울 강남 대치동 떡집 3남매의 막내 은희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여중생이다. 표현이 서툰 아버지(정인기 분), 헌신적인 어머니(이승연 분), 공부를 못하는 언니(박수연 분), 온 가족의 기대주 오빠(손상연 분)는 현실에서도 직접 경험했거나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인물들이다. 그 속에서 막내딸 은희는 건강하게만 자라면 되는 아이다. 수업시간에 낙서하다 선생님께 핀잔을 듣기도 하고, 남자친구와 어설픈 첫 키스를 시도해보기도 하고, 담배를 피거나 문방구에서 학용품을 훔치는 등 소소한 일탈을 시도하지만, 가족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다.

은희의 시선을 통해 영화는 우리가 어떻게 성장해가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1994년이란 시대적 배경은 가족과 친구가 전부인 줄 알았던 중학생을 사회로 끌어들인다. 김일성 사망보다 친구와 다툰 일이 중요한 사춘기 소녀지만 거리의 판자촌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관계없을 줄 알았던 성수대교 붕괴는 은희의 삶에 깊은 흔적으로 남는다.

영화 ‘벌새’ 스틸컷./사진제공=엣나인필름

인물을 향한 감독의 애정 어린 시선 덕에 138분의 러닝 타임이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인물 하나 하나를 보듬는 구성이 은희의 이야기를 우리들의 이야기로 확장 시킨다. 단짝 지숙(박서윤 분)은 은희에게 “너는 네 생각만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은희의 시선이 수술을 앞두고 무너지는 아버지, 인간미라고는 없어 보이던 오빠의 눈물 등으로 향하면서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김 감독은 영화 제목에 대해 벌새의 여정이 은희와 닮아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벌새는 가장 작은 새임에도 1초에 80번 이상 날갯짓을 하며 꿀을 찾아 먼 여정을 떠나 ‘희망’ ‘생명력’ ‘포기하지 않는’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넷팩상, 관객상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서 25관왕에 오른 김보라 감독의 첫 장편영화 ‘벌새’처럼 다음 작품으로 향하는 감독의 다음 여정이 벌써 기대된다.
/한민구기자 1min9@sedaily.com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