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서해에 정박한 프랑스 함대가 수도인 한성으로 들어갈 항로를 탐사하면서 면적 660㎡, 해안선 길이 1㎞에 불과한 작은 섬을 발견했다. 함대는 사령관의 이름을 따 ‘로즈섬(Roze Island)이라고 불렀다. 이 섬은 개항기 내내 로즈섬으로 불리며 열강들의 교두보가 됐다. 지금은 월미도라 불린다.
월미도는 섬의 생김새가 반달의 꼬리를 닮았다고 해서 ‘월미(月尾)’라고 이름 붙여진 것으로 알려졌다. 월미라는 이름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숙종 34년(1708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상소문이다. 이에 앞서 숙종 21년(1695년)에는 비변사등록에 ‘어을미도(於乙味島)’라 기록돼 있다. 해동지도에는 ‘얼미도(孼尾島)’로 표기돼 있다.
월미도는 예로부터 지리적 요충지였다. 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에는 열강의 군함과 상선들이 서로 점유하기 위해 다투는 조차지가 됐다. 일본은 1891년 월미도를 부산 절영도에 이어 두 번째 조차지로 삼아 석탄 창고를 세웠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아관파천으로 조선에서 세력 확장을 노리던 러시아 해군의 조차지가 된다. 러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의 수중에 떨어졌다.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일본은 월미도의 아름다운 풍광을 활용해 관광지로 본격 개발한다. 1923년에는 인천과 월미도를 잇는 길이 1㎞, 왕복 2차선의 제방 둑길을 축조했다. 이후 일본의 식민지 경제 개발을 주도했던 공진회에 의해 야외극장, 호텔, 요정 등 유흥시설이 속속 들어섰다. 한국전쟁의 전환점이 된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서 연합군의 첫 상륙지도 월미도였다. 미 해군 함대와 전투기는 함포 사격과 폭격으로 월미도를 초토화했다.
인천시가 27일 ‘월미은하레일’의 이름을 ‘월미바다열차’로 바꿔 10월8일 정식 개통한다고 밝혔다. 843억원의 혈세가 투입된 월미은하레일은 2009년 개통 예정이었지만 안전 결함 문제로 백지화됐다. 인천시가 추가로 184억원을 투입해 안전성 등을 보완한 끝에 10년 만에 개통되는 것이다. 인천역 인근 월미바다역에서 출발해 월미공원역, 월미 문화의 거리역, 박물관역을 돌아 다시 월미바다역으로 돌아오는 6.1㎞ 코스다. 역사의 아픔이 담긴 근대 이후 문화유산을 많이 보유한 인천 개항지와 월미도 주변 관광지를 연결한다. 월미바다열차가 ‘돈 먹는 하마’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인천을 상징하는 관광 명물로 자리 잡기를 바란다. /김정곤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