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백남준을 만나다] "비디오아트 다음은 인포아트"...20년 앞서 예술 미래상 제시

<25> '인포아트' 정보예술전
1995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으로 기획
신시아 굿맨 前IBM미술관장과 공동디렉터
뉴욕서 인연 맺은 김홍희 큐레이터 맡아
"통신·전자 활용하는 예술 주목받을 것"
'인터액티브 미디어' 시대 펼쳐 보여
국내에 '미지의 역영' 소개 계기 되기도

백남준이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인포아트’를 준비하면서 전시 의도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제공=천호선

백남준은 아침에 눈 뜨자마자 신문부터 찾는 ‘신문 중독자’로 유명했다. 일어나는 시간은 10시쯤으로 느지막했으나 뉴욕타임즈(NYT),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월스트리트저널(WSJ)을 샅샅이 읽었다. 몇 가지 빠진 신문이 있으면 조수들에게 “오는 길에 신문 좀 사 오라”고 당부했다. 독일신문 슈피겔지 등 외신과 한국신문까지 챙겼다. 스튜디오 근처 신문가판대 주인은 백남준이 온다 싶으면 민첩하게 신문들을 한 부씩 뽑아두곤 했다. CNN 같은 보도 전문채널을 항상 켜두고 있었으며, 월가의 주가지수까지 정확하게 꿰고 있었다.

“앞으로의 비디오아트(Video Art)는 인포아트(Info Art·정보예술을 뜻하는 ‘인포메이션 아트’의 줄임말로 백남준의 신조어)가 될 거예요. 컴퓨터와 정보를 합친 게 통신으로, 통신은 세계를 하나로 만들고 새로운 예술을 가능하게 할 겁니다. 앞으로의 세계는 전자(Electronic)의 시대일 것이고, 전자를 활용하는 예술이 주목받을 겁니다. 그러니 정보예술, 인포아트로 가야 합니다.”

백남준은 뉴욕에 있으면서 종종 한국에 있는 김홍희 부부에게 전화를 걸어 이모저모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현재 백남준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홍희는 한국 최초의 대안공간인 쌈지스페이스 관장을 비롯해 경기도미술관장, 서울시립미술관장과 2003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2006년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은 ‘전설의 큐레이터’이다. 그의 남편인 천호선은 지난 1968년 청와대 외교정책담당 행정관으로 공무원생활을 시작해 뉴욕 한국문화원 문정관, 문화부 문화예술국장, 국회사무처 문화관광위원회 수석전문위원을 역임한 ‘1세대 문화예술행정가’다. 이들 부부는 1979년 천호선의 뉴욕 한국문화원 근무를 계기로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그 시절 뉴욕 전위예술의 산실로 ‘키친’이 맹위를 떨쳤는데, 이곳은 백남준의 활동무대로도 유명했다. 1981년 10월 12일, 천호선·김홍희 부부는 현대무용가 머스 커닝햄 댄스컴퍼니 후원회장인 바바라 툴 여사의 초청으로 키친 창립10주년 공연을 관람했다. 이날 공연자로 나선 백남준은 레코드판을 깨뜨리고 바이올린을 내리쳐 부수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당시 헌터칼리지에서 미술사를 공부하던 김홍희는 공연이 끝나자 깨진 레코드판 조각을 냉큼 주워 들고 백남준에게 사인을 해 달라고 했다. 당돌한 첫 만남이었다. 백남준은 그를 스튜디오로 초대해 유화로 정성스럽게 사인을 해 주며 “사인은 공짜지만 이것들은 보석상자에 잘 넣어두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 인연으로 이들은 평생지기가 됐다. 천호선은 1984년 ‘굿모닝 미스터오웰’로 시작하는 ‘인공위성 3부작’의 성사 지원부터 국립현대미술관의 ‘다다익선’ 설치 제안 등 물심양면 백남준을 도왔다. 이들 부부가 백남준과 한국을 잇는 가교였으니 통화가 잦았다. 1995년 초 어느 날 걸려온 전화도 그 중 하나였다.

“광주비엔날레에서 ‘인포아트’라는 제목으로 정보예술 전시를 하려고 해요. 미세스 김(김홍희)이 큐레이터를 맡아주면 좋겠어요.”

‘인포아트’ 전시의 큐레이터인 김홍희(뒷줄 왼쪽) 전 서울시립미술관장과 백남준 등이 준비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뒤쪽으로는 백남준의 아내이자 작가인 구보다 시게코의 출품작 ‘아날로그 가든’이 보인다. /사진제공=천호선

김홍희는 백남준과의 만남을 계기로 비디오아트에 눈을 떴고, 캐나다대사관 공보관으로 옮긴 남편을 따라간 캐나다 콩코디아대학에서 ‘해프닝의 연장으로서의 백남준 비디오아트’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귀국하던 1992년에 논문을 손질해 ‘백남준과 그의 예술’이라는 국문 단행본을 출간했다. 이듬해 1993년 3월에는 대규모 플럭서스(Fluxus·1960년대~1970년대 성행한 국제적 전위예술운동) 행사를 처음으로 국내에 유치했다. 예술의전당 개관기념 축제로 기획돼 국립현대미술관, 독일문화원, 계원예대, 갤러리현대, 원화랑 등지에서 프로그램이 함께 진행됐다. 여기다 서울과 뉴욕의 미디어아트를 연결하는 ‘서울-니맥스(Nymax) 페스티벌’까지 성공시켰으니 백남준 입장에서는 어느새 ‘신뢰할 만한 큐레이터’로 성장한 인물이었다.

백남준은 미국 IBM미술관 관장을 지낸 신시아 굿맨과 공동 디렉터를 맡았다. 김홍희 큐레이터에게는 ‘아시아의 비디오예술과 멀티미디어’를 맡겼다. 이 전시에서 백남준은 ‘구멍론’을 펼친다.


“사람의 몸에는 10개 정도의 구멍이 있다. 그 가운데 눈은 80%의 입력과 20%의 출력 기능을 갖는다. 귀는 98%를 입력하고 단 2% 만을 출력한다. 그러나 이 2%가 매우 중요하다. 부끄러울 때면 귀가 빨개지는데 이것은 인간을 사회와 어울리게 하고 범죄에 빠져들지 않게 하는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이다. 고로 부끄럽다는 뜻의 한자 ‘치(恥)’는 ‘귀(耳)’와 ‘마음(心)’이라는 두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중략) 코는 100% 입력뿐이다. 입은 입력기관인 동시에 출력기관으로서 언제나 극도로 바쁘다. 그리고 가끔 토하기도 한다. 배꼽은 일생에 단 한번 어머니 뱃속에 있는 9개월 동안만 기능한다. 분명히 태아와 어머니 사이에는 광대역의 하이파이 종합서비스 디지털 통신(ISDN) 라인이 연결되어 있다(나는 낙태반대론자는 아니다!).”

백남준은 우리 몸의 구멍을 기계의 입·출력기관에 빗대 ‘인터랙티브 미디어’ 시대를 얘기했다. “하드웨어 장비의 구매가는 고급예술의 혁명과 가난한 예술가의 작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한 백남준은 1960년대부터 시작한 자신의 비디오아트를 되짚으며 향후 20년의 예술을 예견했다.

“개인용 컴퓨터 시대의 도래와 함께 장비가 쇄도하고 ‘실리콘밸리 그래픽스’의 워크스테이션(2만5,000달러)도 3년 내 예술가의 구매 수준으로 가격이 인하될 것이다. 앞으로 20년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2015년에는 어떨까? 슬픈 사실은 그때가 되면 내가 83살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만 빼고는 인터랙티브 아트는 나쁠 게 없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1995~2015년 사이의 비디오 예술은 ‘비디오 예술/비디오 삶’의 쌍방형 소통을 이룩함으로써 스스로를 능가할 것이다.”

제1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으로 기획된 ‘인포아트’ 전시는 백남준과 신시아 굿맨(오른쪽) 전 IBM미술관 관장이 공동 디렉터를 맡았다. /사진출처=Info Art 도록

백남준이 엔지니어 이정성(가운데) 등 전시 관계자들에게 작품 개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제공=천호선

제1회 광주비엔날레는 총 6개의 특별전을 개최했다. 임영방 국립현대미술관장이 기획한 ‘증인으로서의 예술’, 원동석과 곽대원이 기획한 ‘광주, 5월정신전’이 열렸다. 장석원 큐레이터의 ‘문인화와 동양정신’, 지금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 된 미술사학자 윤범모의 ‘한국 근대미술 속의 한국성’, 미술평론가 서성록과 윤진섭이 기획한 ‘한국 현대미술의 오늘’ 전시가 한국 미술의 역사를 훑었다. 여기에 화룡점정이 된 ‘인포아트’ 전시는 예술의 다가올 미래상을 제시했다.

백남준은 한번 시작했다 하면 뭐든 열심이었고,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일을 더 키우는 경우가 잦았다. ‘인포아트’ 전시도 배정된 예산을 훌쩍 넘기고 말았다. 백남준은 CF 출연을 강행하며 예산을 확보했고, 적잖은 사비도 쏟아부었다. 막바지 개막 직전에는 수염 깎을 시간도 없어 덥수룩한 채로, 셔츠 단추도 덜 채운 모습으로 전시장을 누비기도 했다.

김홍희는 “백남준은 정보력이 뛰어났고, 정보라는 것은 그의 예술에서 중요한 일부를 차지하는 개념”이라며 “정보력과 정보에 대한 인식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비디오아트를 생각해 내고 기술을 예술에 활용하면서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게 하는 것을 절대 예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백남준이 고안한 ‘일렉트로닉 슈퍼 하이웨이(전자초고속도로)’나 인터넷 개념은 모두 정보와 관련된 것이며, 백남준은 그것이 우리 실생활에서 미치는 기술적 영향력까지도 간파하고 있었다”면서 “1995년의 ‘인포아트’ 전시는 비엔날레 특별전인 동시에 예술가 백남준의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향후 예술이 어떻게 확장될 것인지를 미리 펼쳐 보인 자리였다”고 평가했다.

백남준이 1995년 ‘인포아트’에 출품한 ‘소통 교통,균형-보상(CommunicationTransportation,Trade Off-Trade In)’. /사진출처=Info Art 도록

물론 앞서 가는 이의 꿈을 실현하기에는 당대 기술력이 ‘못 따라온 부분’도 없지 않았다. 인터넷 접속에만 30분씩 걸리던 시절이었다. 일부 외국 작가들은 광주에 작품을 설치해 놓고 자국으로 돌아가 현지에서 컴퓨터로 제어할 계획을 짰지만, 인터넷이 원활하지 않아 ‘불가능’에 봉착하기도 했다. 백남준의 조수로도 활동한 작가 폴 개린은 CD롬에 영상작품을 담아왔는데, 컴퓨터 메모리 용량이 부족해 작품 가동을 못하는 소동을 겪었다. 백남준의 아내이자 작가인 구보다 시게코가 작품에 매달린 소형 모니터를 도난당한 일도 있었다.

그 와중에 광주비엔날레는 국내에서 열린 예술제 중 처음으로 ‘홈페이지’라는 것을 개설했다. 이재웅과 함께 다음커뮤니케이션을 공동창업한 박건희(1967~1995) 씨가 행사 소개와 함께 호텔예약 전산시스템까지 가능한 홈페이지를 구축했다. 그 덕에 광주비엔날레는 ‘최첨단 정보통신기법’을 이용한 국제적 홍보에 나설 수 있었다. 당시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이자 홍보전문위원이기도 했던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그때만 해도 비디오아트는 해외 미술관에서만 다뤄지고 국내에서는 ‘미지의 영역’일 뿐이었는데 백남준이 본격적으로 소개할 계기를 만들었다”면서 “세계적 수준의 큐레이터와 작가들을 그러모은 백남준은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뿐만 아니라 문화행정의 측면에서, 오늘날 한국미술의 변화와 발전사의 한 축에서 결정적 계기가 된 인물이다”고 평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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