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연합뉴스
최고인민회의 이후 내부정비를 마치고 북미 실무협상에 나설 것으로 보였던 북한이 되레 비핵화 협상의 판을 깰 수 있다는 강력한 경고를 31일 미국에 보냈다.
한미연합군사훈련이 끝난 뒤 이뤄질 것으로 보였던 비핵화 협상이 다시 교착상태에 빠진 형국이다.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은 이날 발표한 담화에서 “미국과의 대화에 대한 우리의 기대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지금까지의 모든 조치들을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로 떠밀고 있다”고 말했다.
최 1부상은 지난 27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우리는 북한의 불량행동이 간과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고 한 것에 대해 “미국의 외교수장이 이런 무모한 발언을 한 배경이 매우 궁금하며 무슨 계산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지켜볼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끔찍한 후회를 하지 않으려거든 미국은 우리를 걸고 드는 발언들로 우리의 인내심을 더 이상 시험하려 들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미국을 위협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개장을 앞둔 평안남도 양덕군 온천관광지구 건설장을 현지 지도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31일 보도했다. 사진은 중앙통신이 홈페이지에 공개한 것으로, 수행 간부들과 현장을 돌아보는 김 위원장의 오른 손에 담배가 들려있다./연합뉴스
북한이 실무협상에 응하지 않는 것은 결국 포괄적 비핵화 로드맵 등 일괄 타결식 빅딜이라는 강경론을 고수하고 있는 미국의 태도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한 벼랑 끝 전술로 분석된다. 미중 갈등이라는 동북아의 정세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조기 대화 재개보다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압박이 협상에서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재선을 위해 동맹국과 외교갈등도 불사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상황도 북한의 강경론에 힘을 실어줬을 것으로 관측된다.
실제 대화의 판을 재검토할 수 있다며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최대압박에 나선 북한은 동북아의 패권을 두고 미국과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중국과의 밀착도 강화하고 있다. 중국의 개입은 북미 비핵화 협상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중국 외교부는 왕이(王毅)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다음 달 2∼4일 북한을 방문한다고 밝혔다. 겅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북·미 관계 긴장과 관련 “현재 한반도 정세는 전체적으로 비교적 완화 국면에 있고,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 역시 궤도에 올라 있다”면서 “우리는 각국이 접촉과 소통을 강화하고, 서로 마주보고 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외교가에서는 왕 국무위원의 방북을 계기로 김 위원장이 중국을 답방할 것이라는 전망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특히 미중패권 전쟁이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중국이 미국과의 힘 싸움에서 북한 비핵화 카드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것이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어 북미 비핵화 협상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4차 방중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월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과 악수하는 모습을 조선중앙통신이 10일 보도했다./연합뉴스
북미 내에서 비핵화 협상과 관련 이상 징후가 나오던 시점은 공교롭게도 북중 협력이 경제분야를 넘어 안보영역으로 확대되는 시점과 맞아떨어진다. 폼페이오 장관은 지난 20일(현지시간) 미 CBS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진행자가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를 거론하자 “그들(북한)은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온건파인 폼페이오 장관이 북한이 발사한 미사일과 관련 ‘탄도’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이례적이다. 그간 트럼프 행정부는 북미 비핵화 협상의 분위기 조성을 위해 북한의 도발을 탄도 미사일이 아닌 단거리 미사일로 규정하며 의미를 축소해왔다. 하지만 강경파인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 이어 온건파인 폼페이오 장관 마저 북한의 미사일 시험을 위협적인 도발로 규정하는 듯한 메시지를 내면서 북미 관계가 순조롭지 않은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비슷한 시기 북중은 고위급 군사회담을 진행하고 양국의 안보협력을 강화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AP=연합뉴스
한편 북한의 태도변화를 감지한 미국 역시 김 위원장의 아킬레스건인 인권문제와 경제제재에 대한 공세에 나섰다.폼페이오 장관은 30일(현지시간) 세계 강제실종 희생자의 날을 맞아 북한을 겨냥해 “전 세계 너무 많은 곳에서 강제실종이 권위주의 정권의 손에 의해 정기적으로 일어난다”고 비판했다.
미국 재무부도 이날 정제유 제품에 대한 북한과의 불법 해상 환적에 연루된 대만인 2명과 대만 및 홍콩 해운사 3곳(대만 2곳, 홍콩 1곳)에 대한 제재를 단행했다. 이번 제재가 북미 실무협상 교착국면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미국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OFAC)은 이날 ‘북한 선박과의 선박 대 선박 환적에 관여된 해운 망을 제재한다’는 제목의 보도자료에서 기존 제재에 대한 시행 및 집행을지속하는 차원에서 이러한 조치를 취했다고 발표했다. 제재 대상은 대만인 황왕컨과 그의 부인 천메이샹 등 2명, 주이팡 해운과 주이쭝 선박관리 등 대만 업체 2곳, 주이청 해운 등 홍콩 업체 1곳이다.
다만 김 위원장 역시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제재 압박이 길어질 경우 정치·경제적 부담이 커지고 트럼프 대통령 역시 ‘북한 리스크’가 부각되는 것이 재선 정국에 좋지 않기 때문에 양국의 깜짝 실무협상 재개 가능성도 여전히 배제할 수 없다.
/박우인기자 wipark@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