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싸도 美 FDA가 낫다”…국내 바이오벤처 ‘식약처 패싱’

[국내 신약심사 초라한 자화상]
신약개발은 속도·정확성 생명인데
식약처 심사위원 연봉 ‘FDA 절반 이하’
인력부족에 시험시작 6개월 걸리고
인보사 사태 등으로 신뢰도 추락
400배 비싼 비용에도 미국행 선택

최근 브릿지바이오가 국내 바이오벤처 사상 처음으로 1조5,000억원 규모의 기술수출에 성공한 신약 후보물질 ‘BBT-877’. 이 물질은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임상시험 중인 의약품 정보를 제공하는 ‘의약품안전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다. 브릿지바이오가 임상1상 시험 허가를 식약처 대신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받았기 때문이다. 임상1상은 50명 내외의 환자를 대상으로 약이 유해하지 않다는 것만 증명하면 되는 만큼 미국 시장 진출을 노리는 의약품이더라도 국내에서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최근 이러한 기류가 바뀌고 있다. 국내 바이오 업계의 ‘식약처 패싱’이 급증하고 있다.

임상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다수의 바이오벤처가 식약처 대신 FDA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신약허가신청을 하기 위해 FDA에 지급해야 하는 비용은 약 30억원으로 700만원인 식약처의 400배에 달하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업체들은 신약 개발에서 비용보다는 속도와 정확성이 훨씬 중요한 만큼 비싼 비용은 감수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31일 제약·바이오 업계에 따르면 브릿지바이오·지놈앤컴퍼니 등 다수의 바이오벤처가 한국 대신 미국에서 임상시험에 착수했거나 진행할 예정이다. FDA 품목허가 승인을 앞둔 SK바이오팜의 뇌전증 치료제 세노바메이트는 국내에서 아직 임상1상도 마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각 회사는 FDA 허가 경험을 갖춘 임상 전문가 영입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SK바이오팜은 이날 임시주주총회를 통해 FDA에서 한국인 최초로 부국장 지위를 역임한 안해영 박사를 사외이사로 신규 선임했다. 노브메타파마는 해외인재 영입에 스톡옵션 50억원을 부여했고 앱클론도 지난달 FDA 허가 과정을 경험한 마르코 쿠엘라 교수를 영입했다. 엔케이맥스 역시 미국 의약의 권위자 3명을 과학자문위원으로 초빙하며 인력 보강에 나섰다.

이들 회사는 “차라리 FDA에서 심사받는 게 더 편하다”고 한결같이 전했다. 식약처의 고질적인 인력난으로 심사가 언제까지 미뤄질지 가늠조차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바이오벤처의 한 관계자는 “식약처에 임상시험을 신청하면 시작하는 데만 6개월이 넘게 걸린다”며 “연구개발(R&D)에 집중해야 하는 업체 입장에서는 돈이 많이 들더라도 한 달이면 임상 개시 여부가 통보되는 FDA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놈앤컴퍼니 관계자 역시 “FDA는 우리 회사가 개발하고 있는 마이크로바이옴 기반 신약의 임상1·2·3상을 승인하고 심사한 경험이 있다”며 “돈이 많이 들지만 심사 경험이 있는 만큼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인보사 사태’로 인한 식약처의 신뢰도 추락도 한몫했다. 국내 제약사의 고위임원은 “품목허가까지 받은 제품인데, 대학생도 수행할 수 있는 다중효소연쇄반응(PCR)으로 확인 가능한 세포 변경을 몰랐다는 점은 충격적이었다”며 “해외에서 식약처의 검증을 믿을 수 있을지 의문인 만큼 굳이 식약처의 검증을 힘들여 받아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물론 식약처도 할 말이 많다. FDA에 비해 훨씬 적은 인력과 낮은 심사비로 심사를 진행해야 하는 만큼 현실적으로 FDA 수준의 검증 과정을 거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식약처의 바이오의약품 품목당 심사인력은 5명으로 FDA(40~45명)의 9분의1 수준이다.

심사인력의 질을 비교하면 격차는 더 벌어진다. 식약처 심사인력 중 의사는 13명에 불과하다. FDA의 500명과 비교조차 부끄러운 수치다. 게다가 정규직은 3명에 불과해 식약처 소속 변호사(9명)보다 적다. 최근 개발이 이뤄지고 있는 세포 치료제, 유전자 치료제 등의 바이오의약품은 작용 기전상 의사의 검증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품목허가 취소 처분을 받은 인보사 역시 약사보다 병리학을 전공한 의사가 심사에 더욱 적합하다.

식약처는 “의사 채용을 적극 추진하고 있지만 이미 높은 급여를 받는 의사들이 식약처로 오려 하지를 않는다”고 강변한다. 식약처 임상시험 심사위원 중 가장 많은 임금을 받는 의사의 연봉이 장관 연봉 수준인 1억2,000만원인데 이마저도 일반 병원 의사와 비교해 낮을 뿐 아니라 오송이라는 지역적 한계 때문에 일하려는 의사를 구하기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FDA의 경우 신약 심사인력의 연봉이 최소 20만달러(약 2억4,000만원)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식약처에 취직한 경우에 받는 연봉인 3,500만원 선의 8배다.

아울러 식약처 임상시험 심사위원은 품목허가를 내린 의약품에 문제가 생길 경우 책임도 져야 하는 자리다. 인보사 사태 이후 식약처 내에 일부 인원에 대한 책임론이 일고 있다는 소문은 이미 업계에 파다하다. 의사들에게 사명감과 책임감을 강요할 수 없는 만큼 해결책은 더욱 높은 연봉뿐인데 식약처의 재정이 발목을 잡고 있다.

업계는 해답으로 식약처의 품목허가 심사비용을 FDA만큼은 아니더라도 적정 수준 이상으로 올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FDA는 조직 운영에 필요한 비용의 절반을 정부 지원에서, 나머지 절반은 제약회사에서 충당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재정적인 건전성을 유지하고 정부와 제약 업계 사이에서 갈등을 중재해나갈 수 있었다. 식약처가 외부에 휘둘리지 않고 공정하고 정밀한 심사를 하기 위해 신약허가 수수료 정상화로 독자재정을 꾸릴 수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미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 등 업계 관계자들은 식약처에 “돈을 더 내더라도 정확한 심사를 받고 싶다”고 요청한 바 있다.

한 바이오벤처 대표는 “현재의 낮은 품목허가 심사비용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보고 있는 곳은 바이오벤처가 아니라 외국계 제약사”라고 귀띔했다. 이 관계자는 “수천억원이 필요한 임상시험 비용에서 몇 십억원이 없어 임상시험 품목허가 심사를 받지 못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며 “국내에서 30년간 나온 신약이 30개에 불과한데 이 30개의 의약품을 제외한 외국계 제약사의 신약들은 식약처 심사원의 인건비만도 못한 비용으로 허가를 취득하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우영탁기자 ta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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