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가 양혜규. /사진제공=국제갤러리
“서기 2000년이 오면 우주로 향하는 시대/ 우리는 로켓트 타고 멀리 저 별 사이로 날으리/ 그때는 전쟁도 없고 끝없이 즐거운 세상 (하략)”
전시장 문앞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가수 민해경이 지난 1982년 발표한 ‘서기 2000년’이다. 과연 그 노랫말처럼, 우리는 전쟁 없고 즐거운 세상에서 별 사이를 날며 살고 있는가. 지나가 버린 미래에 대한 쓴웃음과 그럼에도 희망을 노래하던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교차한다.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국제적인 현대미술가로 맹활약 중인 양혜규(48)의 전시는 이렇게 관객을 맞는다. 삼성미술관 리움에서의 전시 이후 4년 만인 그의 국내 개인전이 ‘서기 2000년이 오면’이라는 제목으로 3일부터 삼청로 국제갤러리에서 열린다.
뜬금없어 보이는 대중문화와 역사적 인물, 사건 등을 실험적으로 엮어내는 것은 양혜규의 특기 중 하나다. 혹여나 ‘전시보러 왔는데 그림은 어디 있나’ 물을 생각은 접자. 전시장을 감싼 벽지 작업부터 군데군데 놓인 물건들을 포함한 공간과 분위기 전체가 작업이기 때문이다.
희고 반듯하던 공간을 유기적이고 입체적인 곳으로 바꿔놓은 벽지 작업 ‘배양과 소진’은 지난해 작가와 독일의 그래픽 디자이너 마누엘 래더의 협업으로 탄생했다. 프랑스 몽펠리에 라 파나세 현대예술센터에서의 개인전을 통해 처음 공개됐다. 양파와 마늘, 무지개와 번개, 의료 수술 로봇, 짚풀, 방울 같은 각양각색의 사물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다. 작가는 프랑스 남부 옥시타니아(Occitania) 지역을 조사했고 그곳에 전해오는 이교도적 문화의 흔적과 근현대 교육, 하이테크 산업 문화의 공존을 이 같은 작업으로 보여줬다.
그런가 하면 전시장에는 가로 9줄, 세로 10줄의 장기판이 바닥에서 벽 쪽으로 접힌 채 올려 있다. 장기판 연결부에 홀로그램 처리가 되어 있어 빛의 반짝임을 볼 수 있다. 그 위에는 향기나는 짐볼이 놓여 있다. 관객이 그 공을 움직일 수도, 위에 걸터앉을 수도 있다. 보는 이를 끌어들여 ‘함께 만들어가기’를 청하는 작품들이다.
블라인드를 소재로 제작돼 전시장 중앙을 차지한 ‘솔 르윗 동차(動車)’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지나면서 보는 각도와 보이는 대상이 달라지고, 심지어 손잡이를 잡고 작품을 움직이게 할 수도 있다. 작가는 2000년대 중반부터 바람, 빛, 온기 등을 전하는 감각적 소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때 택한 것이 블라인드다. 작가는 “블라인드는 공간을 양분하면서도 개방과 폐쇄의 양가적 특성을 지닌다”고 얘기한다.
공간 모서리에 설치된 ‘소리 나는 운동’도 기이한 작품이다. 매달린 조각의 원형 몸체를 손으로 회전시키면 문양이 바뀌고 소리도 난다. 고대에서부터 사용되던 방울이라는 소재를 통해 “침묵과 부동의 상태를 소리와 호출로 확장시킨 인류의 보편적 경험을 일깨운다”.
보이고 들리는 작업이 전부가 아니다. 글 묶음으로 놓인 ‘융합과 분산의 연대기-뒤라스와 윤’은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1914~1996)와 한국의 작곡가 윤이상(1917~1995)의 연대기를 작가가 주관적 관점으로 교차 편집한 내용이다. 양 작가는 동시대의 사회적, 정치적 격변기를 살아낸 두 인물을 통해 식민주의와 냉전시대, 사회적 변혁과 정치적 갈등을 매혹적으로 들여다 봤다.
양혜규는 서울대를 졸업한 후 1994년 독일에서 유학했고 현재 모교인 슈테텔슐레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미술전문매체 아트팩트넷이 선정한 세계 300대 미술가 중 하나인 그는 2009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2010년 광주비엔날레, 2012년 카셀도쿠멘타 등에 참가했고 파리 퐁피두센터 등 유수의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