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수의 기계조각 ‘액션 페인팅’(왼쪽)과 그 기계움직임의 결과물인 회화 ‘레인(Rain)’ /사진제공=갤러리수
‘35만 7,461’ ‘35만 7,462’ ‘35만 7,463’
철커덕. 막대 솔이 또 한번 왕복했다. 전시가 개막하던 지난달 9일부터 3일 아침 현재까지 작가 한진수의 기계식 조각 설치작품인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은 한순간도 쉰 적 없다. 붓끝에 물감을 묻힌 채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이 작품에는 ‘기계 예술가’라는 별명이 붙었다. 전시장 불이 꺼진 밤중에도 기계는 홀로 멈추지 않았고, 붓질 한 번에 계기판의 숫자는 또 하나씩 올라간다.
이것 뿐이면 싱거우려나. 그림도 있다. 옆에 걸린 폭 117㎝, 길이 181㎝의 회화 ‘레인(Rain)’은 화면 위 절반은 흰색, 나머지 아래는 분홍색이다. 조각을 전공한 작가는 뚝딱뚝딱 기계를 만들었고, 하루 한 번씩 캔버스 가운데 붓 닿는 자리에 물감을 듬뿍 짜두었다. 움직임의 범위와 속도를 ‘설정’한 것은 작가이나 그림을 그린 것은 기계였다. 매뉴얼 대로 정해진 ‘필연’적일 것 같은 그림이지만 물감이 튀고 흐르는 ‘우연’이 더해졌다. 삭막한 기계가 눈 깜빡임 같은 계기판의 숫자 변화, 숨소리 같은 모터 움직이는 소리로 생각지 못한 위안을 덤으로 전한다.
한진수의 ‘낙타새와 황금알’(왼쪽 아래)과 김홍식의 ‘욕망의 숫자’ 연작들. /사진제공=갤러리 수
한진수의 설치작품 ‘리퀴드 메모리’ /사진제공=갤러리 수
종로구 팔판길 갤러리 수가 한진수, 김홍식, 블루숩의 3인 기획전 ‘이중적인 진심을, 그대에게’를 오는 15일까지 연다. 지난해 뉴욕에서도 선보인 적 있는 한진수 ‘액션 페인팅’은 자연스레 ‘수행에 가까운 반복적인 붓질’이 강조된 이른바 ‘단색화’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그렇지 않다”고 선을 그었지만 상상은 각자의 몫이다. 수만번, 수십만 번의 쉼없는 붓질은 ‘사람도 못할 일’이라 기계가 하는 것일테이지만 그 소리와 과정의 성실함이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진정한 비움을 욕심 없는 기계가 해냈다. 과정을 생략한 채 결과물로서의 그림만 보는 현대인의 감각에 경종을 울린다.
한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이자 거품 기계인 ‘낙타새와 황금알’은 작은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며 핑크빛 거품을 만들어낸다. 기계가 만들어내는 거품이 어린 시절 비눗방울의 향수를 떠올리게 하고 실제로도 향기가 난다.
김홍식 ‘욕망의 숫자’ /사진제공=갤러리 수
그 맞은편에 걸린 작품은 김홍식의 신작 ‘욕망의 숫자’다. 짙은 빨간색 립스틱이 은회색 바탕 위, 금빛 액자 속에서 강렬하게 빛난다. 당당한 여성성의 상징이자 여성의 욕망을 자극하는 광고이미지에서 빌려온 이 빨간 립스틱은 여성이 드러내는 아름다움과 여성을 바라보는 성적(性的) 환상을 ‘이중적’으로 비춘다. 부러진 하이힐도 마찬가지다. 에칭 판화기법을 활용하는 김 작가는 조각에서나 느낄 법한 물질성을 평면에 담아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산책자’ 시리즈로 불리는 미술관 속 군중의 행위를 포착한 작품들도 바라보는 사람과 보여지는 대상의 양가적 특성을 보여준다.
김홍식 작품 전시 전경. /사진제공=갤러리 수
2층 안쪽의 영상작품은 러시아 아티스트 그룹 블루숩(Bluesoup)의 ‘작은 폭포’다. 느릿한 물의 움직임이 마치 걸어오는 발자국 같아 시선을 뗄 수 없다. 걸려있는 헤드폰으로 ‘소리’를 함께 감상하면 더 깊이 빨려든다. 사실 이 장면은 가상의 풍경이다. 폭포수가 가까워올수록 관객은 현실 그 이상의 감각적 경험을 하게 된다. 실제와 경험이 과연 무엇인지 되묻게 된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