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봉오동전투’를 본 일부 관람객들 가운데는 이 영화에 나오는 일본군이 너무 잔혹하게 묘사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반응도 있다고 알려진다. 또 올 7월 발간돼 논란이 일고 있는 책의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은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경찰의 즉결총살 장면 등 일제가 한국인을 거의 ‘광적으로’ 학살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는데 이는 실재하지 않은 터무니없는 조작이라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아는 한 일제의 ‘조선’ 식민지 통치 기간과 그 전후 시기에 일본 경찰이나 군이 한국인을 ‘광적으로’ 학살한 사례는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거론할 수조차 없는 형편이다. 이에 1920년 10월 말 전후 시기에 일본군이 소위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중국 연변 지역(북간도)에 침입해 독립군 관계자 및 후원자들을 무차별로 색출해 탄압, 학살한 일부 사례를 공개하고 희생된 ‘의인’들을 뒤늦게나마 소환해 보고자 한다.
올해 10월은 독립군의 ‘청산리대첩’이 있은 지 99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청산리대첩의 실상이나 전과에 대해서는 상당한 연구가 진행돼 그 진상이 비교적 상세하게 규명돼 있다. 그러나 이 시기 일본 군경은 중국 영토인 중국 연변(북간도)과 남만주 서간도 지방에 침입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온갖 학살만행과 폭행, 각종 탄압행위를 자행했다. 역사학계에서는 이를 ‘간도참변’, 또는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체계적 규명은 아직 미흡한 실정이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 때 희생된 독립군. 정규군과 같은 복장을 하고 있으며 러시아제 소총을 휴대하고 있다./사진제공=김약연 기념사업회
잘 알려진 대로 일본군은 1920년 8월 소위 ‘간도 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세우고 같은 해 10월 ‘훈춘사건’을 조작해 소위 ‘간도 출병’을 단행했다. 훈춘사건이란 일본군이 마적토벌을 구실삼아 훈춘 지역 조선인과 독립운동가들을 대량 학살한 사건이다. 이에 맞서 독립군의 ‘청산리 독립전쟁’이 전개됐음은 잘 알려져 있다. 일본군은 독립군에 큰 피해를 입고 결국 독립군 추적에 실패하고 난 뒤 1921년 5월까지 북간도 및 서간도 지방에서 대대적 학살만행을 저질렀다.
강덕상, 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 편 ‘현대사자료 28(조선 4)(도쿄 미스즈서방, 1972)’에 따르면 1920년 가을 중국 연변 지역(북간도)에 출동한 일본군 제28여단이 이 지역에서 조선인 522명을 죽이고 조선인 가옥 534채를 불태웠다. 기록을 보면 당시 일본군의 만행으로 인한 재산 피해액이 66,850엔(원)으로 추정된다는 통계도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인명 및 재산 피해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러한 피해 사례는 일본군 스스로 보고한 내용 중 대표적인 몇 가지만 봐도 잘 나타난다. 일본군 보병 73연대 보고에 따르면 청산리에서 사로잡힌 김문순(金文順·목재상)은 1920년 10월28일 단순히 도주했다는 이유로 화룡현 옥석동에서 총살됐고 안종구(安鐘九·목재상) 역시 총기 은닉과 군(軍) 전당포 횡령, 일본군 수비대를 기만했다는 혐의로 옥석동에서 같은 해 12월9일 죽임을 당했다. 제대로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만행을 저지른 경우도 있었다. 일본군 보병 75연대 보고 사례를 보면 당시 41세와 34세였던 황하구(黃河龜)와 강철규(姜徹奎)는 불온서적을 배포하고 끝까지 독립운동을 강행하는 등 단념할 의지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칼로 난자당했으며 한민회 소장이었던 장홍극(蔣洪極·재봉업)도 러시아령 각지의 불령단과의 연락을 맡고 있었다는 이유로 참살당했다.
일본군의 만행을 피해 도망가다 참극을 당한 이들도 있었다. 당시 65세에 달했던 정길순(鄭吉順)은 일본군의 토벌 작전에 체포돼 끌려가다 야음과 눈발을 틈타 도주했지만 결국 붙잡혀 사살당했다. 이외에도 집안을 수색하는 데 저항한다는 혐의로, 또는 촌민들로부터 기부금을 모금해 그 돈을 독립운동하는 이들에게 제공했다거나 불온사상을 선전한다는 이유로 참살당한 이들이 상당수에 달한다.
이러한 보고내용을 보면 일본군이 제멋대로 한인들을 마구 학살했음을 잘 알 수 있다. 총살(독립운동 후원이나 주도 혐의자), 사살(전투 중 혹은 도주자), 참살(목을 베는 것·군자금 모집이나 독립운동 혐의자), 자살(刺殺·총칼로 찔러 죽이는 것) 등의 극히 잔인한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이밖에 타살·고문·생매장·방화·약탈은 물론 여자의 경우 강간도 서슴지 않는 등 매우 잔인한 방법이 총동원됐다. 이러한 희생자들은 우리가 전혀 몰랐던 ‘이름없는 영웅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길현 구사하에서는 피난 간 창동학교(昌東學校) 교사 정기선(鄭基善)을 체포해 얼굴가죽을 벗겨내고 눈알을 빼서 서씨 가족과 함께 묶은 뒤 집에 가둬놓고 불을 질러 태워 죽이고 말았다. 이밖에 일본군경의 천인공노할 만행에 의한 참혹한 탄압사례는 부지기수이다.
연길 부근 용정촌 두도구(頭道溝) 부근에서는 일본군 전신대가 전선이 절단된 것을 발견하고 마침 그 자리에 있는 한 중국인 농부를 범인으로 지목해 체포하고 처치하려 했다. 그런데 그 중국인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갑자기 생각나는 대로 부근의 마을에 있는 12~13세가량의 조선인 어린이 행위라고 무책임하게 떠넘겼다. 이에 일본군 전신대는 곧바로 그 마을로 가서 어린 소년을 사로잡아 현장에서 참수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 어린이의 머리를 전선에 매달아놓아 많은 사람이 보도록 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장암동 학살사건’ 기념비 측면에 새겨진 글귀. 36명이 희생됐음을 밝히고 있다. /사진제공=다인여행기획
특히 1920년 10월30일 제2의 ‘제암리사건’이라 할 수 있는 장암동(獐巖洞) 학살사건이 일어나 많은 내외국인을 놀라게 했다. 당시 학살에서 희생된 이들은 알려진 것만 36명. 당시 연변 지역에서 이러한 참변을 직접 목격한 미국인 장로교 선교사 마틴(S H Martin·馬丁)은 참혹한 내용을 적은 수기를 남겼고 그 내용이 서방세계에 알려지면서 3·1운동 탄압사례처럼 일본군의 만행이 폭로되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간도지방 학살만행을 폭로한 시카고 데일리의 1920년 12월16일자 기사. ‘재판 없이 살해되는 한국인들’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사진제공=독립기념관
결국 일본 군경은 이러한 만행으로 한인사회를 초토화해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없애는 데 일시적으로 성공한 듯했다. 경신참변 후 일제의 무력탄압이 강화되면서 친일세력이 확산되고 일제 측의 한인 지배정책이 강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한인들의 저항과 민족운동은 줄기차게 지속돼 일본제국주의 세력을 괴롭혔다.
이제 각종 자료를 종합해 간도 참변의 피해 상황을 검토 종합하고 잊혀진 무명의 희생자와 의인·영웅들을 심층적으로 조명할 필요가 있다. 각종 통계의 차이를 객관적으로 검토하는 연구도 필요하다. 추후 진상규명과 대일 사죄, 보상과 배상요구가 시급한 실정이다.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수석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