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수 한국국제통상학회장은 “국제 통상질서가 ‘룰 베이스’에서 ‘파워 베이스’로 급격히 전환하고 있다”며 “대외 의존도가 높은 우리로서는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염두에 두고 전략적 대응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욱기자
1년 넘게 끌어온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이 진정되기는커녕 확전 일로를 걷고 있다. 미국이 지난 1일부터 1,120억달러 규모의 중국산 제품에 대해 15%의 관세 부과를 발효하자 중국도 같은 날 750억달러 규모의 미국 상품에 5%의 보복관세 폭탄을 투하했다. 미국은 이미 25% 관세를 부과한 2,500억달러 규모의 중국산에 대해서도 관세율 인상을 예고했고 이에 맞서 중국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대응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양국 모두 관세 폭탄 품목도 추가로 확대할 방침이다. 치킨게임 양상을 띤 세계 1·2위 경제 대국의 무역전쟁이 지구촌 경제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형국이다. 그런가 하면 한일관계는 일제의 강제징용 배상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하면서 경제전쟁으로 번지고 있다. 가뜩이나 국내 여건마저 녹록하지 않은 우리 경제로서는 설상가상이다. 당장 수출 전선부터 빨간불이 켜졌다. 한국국제통상학회장인 강인수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를 대학 연구실에서 만나 급변하는 국제 통상질서를 진단하고 통상 한국의 진로를 들어봤다.
中, ‘반도체 굴기’ 다시 속도 내면
美무역확장법 232조 추가 발동 우려
무역전쟁 향후 변수는 미 경기상황
시진핑, 90년대 ‘도광양회’ 감수할 것
-미국과 중국과의 무역전쟁이 점입가경이다. 앞으로의 전개 방향을 어떻게 예측하나.
△내년 11월 미국 대선 때까지 장기화할 것이라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두 가지 시나리오가 예상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개인적 특성을 보면 작은 딜(합의)을 하고도 크게 부풀려 자신의 공적이라고 포장하는 경향이 있다. 대선 때까지 지지층에 보여줄 가시적 성과를 내려 할 것이기에 어떻게든 중국과 절충점을 찾을 것이다. 이것은 낙관적 시나리오다. 반대로 백악관에는 강경 매파들이 존재한다. 이참에 미국의 턱밑까지 추격해온 중국을 눌러놓자며 죽기 살기 식으로 싸울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무역전쟁 양상은 예측불허다. 야당인 민주당도 후자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두 가지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를 꼽는다면.
△전개 방향은 미국의 거시경제 상황에 달려 있다. 내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 행정부로서는 경기를 띄워야 한다. 과도할 정도로 금리 인하를 압박하는 이유다. 만약 경기가 고점을 지나 하강 국면으로 향한다면 무역전쟁 격화는 부담이다. 중국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무리수를 두기 어렵다는 말이다. 이 경우 타협을 선호할 것이다. 반대로 금리 인하 등으로 경기 확장 국면이 지속한다면 끝까지 갈 것이다. 주요2개국(G2)의 무역전쟁은 아직 미국 경제에 부담을 줄 정도는 아니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이 장기화·전면전 양상을 보이고 있다. /AFP=연합뉴스
-G2 무역전쟁은 결국 패권전쟁이 아닌가.
△그렇다. 단순히 무역수지 불균형을 바로잡는 데 그치지 않는다. 트럼프의 유난스러운 기질과 비즈니스 협상술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중국 견제는 이전 정부 때부터 있었다. 노동력이 필요한 제조업 추격이야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지만 미래의 기술 패권까지 도전하겠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중국의 ‘제조 2025’는 미국을 강하게 자극했다. 핵심 미래기술의 자급도 85% 달성이 핵심인데 미국은 그 수단이 기술탈취에 있다는 심증을 갖는 듯하다. 천문학적인 보조금과 국영기업의 육성도 공정한 경쟁이 아니라고 본다. 지적재산권을 침해해도 중국 정부는 방관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할 때 약속했던 것을 위반한 것이라고 본다. 예컨대 미국은 화웨이가 민간기업이 아니라 중국 정부가 통제하는 기업으로 본다. 지배구조를 보면 회장의 지분은 1%밖에 안 되고 임직원이 퇴사하면 보유주식을 회사에 반납해야 한다. 군 출신 간부들도 많다. 트럼프가 재집권하든 민주당이 집권하든 패권경쟁을 좌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이 어떻게 대응할 것으로 보는가.
△중국은 연초에 무역적자 해소와 지적재산권 보호에 나서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트럼프의 강공에 일단 몸을 낮췄다. 중국은 미국과 딜을 하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 체제를 위협하거나 자존심을 건드리는 상황까지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보조금과 국영기업 문제 등은 내정의 문제로 인식한다. 공정무역의 이행 감시를 위한 ‘스냅 백’ 조항은 절대 수용하지 못한다. 중국은 시진핑 장기집권체제가 사실상 완성됐다. 미국을 넘어서는 ‘중국몽’ 완성을 위해서라면 과거의 도광양회(韜光養晦·힘을 기를 때까지 인내한다는 덩샤오핑 시대의 외교전략) 시대로 돌아가는 것도 감수할 태세다.
-중국은 무역전쟁이 격화하자 위안화 가치를 낮추고 있는데 미국이 과거 일본을 때렸던 ‘플라자합의’ 같은 요구를 하지 않을까.
△1980년대 미국·일본의 상황은 지금과 다르다. 엔화 가치를 2배 끌어올린 플라자합의 때 미국은 ‘슈퍼 301조’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트럼프는 이미 그런 카드를 써버렸다. 과거에는 주요5개국(G5)이 공조했지만 지금은 각자도생의 시대다. 유럽이 미국과 협력할 턱이 없다. 미국이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했지만 후속조치가 마땅찮다.
-미중 무역전쟁 통에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피해가 큰데.
G2 무역전쟁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으면 한국 반도체에까지 불통이 튈 것으로 우려된다. /서울경제DB
△올 들어 수출이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반도체 가격 하락과 미중 무역전쟁의 영향이 크다. 미국·중국보다 우리가 더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미국은 중국을 겨냥했지만 엉뚱하게도 우리가 유탄을 맞을 수 있다. 자동차가 그런 분야다. 더 우려되는 것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품목도 미 무역확장법 232조의 적용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철강과 알루미늄이 첫 적용 대상이었으나 안보를 내세우면 반도체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최악의 시나리오다. 지금은 중국의 반도체 대미 수출물량이 미미하지만 반도체는 중국의 ‘제조 2025’의 핵심품목이다. 중국이 화웨이 제재로 주춤한 반도체 굴기에 다시 속도를 낸다면 언제든 관세 폭탄이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미국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을 또다시 요구할까.
△한미 FTA가 개정됐다고 해서 재개정 요구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오산이다. 한미 FTA는 어느 한쪽이 개정을 요구할 수 있다. 수용하지 않으면 자동 폐기된다. 적어도 내년까지는 또 바꾸자고 닦달하지는 않겠지만 개정 요구는 상수로 봐야 한다. 그렇게 머지않은 장래에 한미 FTA 재협상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 미국의 통상전략을 간파하고 준비해야 한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나프타) 대체협정에 담긴 내용을 주목해야 한다. ‘미국·멕시코·캐나다협정(USMCA)’은 원산지 규정을 강화하고 저임금 수출을 차단하는 장치가 있다. 환율조작 방지도 담겨 있다. 나프타를 대체한 USMCA는 앞으로 미국 통상정책의 규범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日 경제보복은 한국 반도체 죽이기
한미 FTA 재협상 또 요구는 ‘상수’
한국 ‘전략적 모호성’ 유효하지 않아
통상 최악의 시나리오 염두에 둬야
지난 6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이동통신박람회 ‘MWC 상하이’에서 5G 기술을 선보인 화웨이의 전시 부스. /연합뉴스
-화웨이 사태로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데.
△지금까지 유지해온 ‘전략적 모호성’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것 같다. 민간기업의 거래는 시장 자율에 맡긴다는 정부의 입장은 단기적으로 유효하고 적절하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 우리 입장을 정리해야 한다. 화웨이 사태는 잠복한 듯 보이지만 여전히 진행 중이다. 지난주에도 트럼프는 화웨이와 거래하지 말라고 재차 경고했다. 주한미군 분담금 증액 요구와 일방통행식 통상 압력이 맘에 들지 않는다 해도 미국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차치하고서라도 세계 경제질서가 여전히 미국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무역전쟁이 끝나더라도 패권전쟁은 지속할 것이기 때문에 제2, 제3의 화웨이 사태가 불거질 수 있다. 국제통상질서는 과거 ‘룰 베이스’에서 ‘파워 베이스’로 전환하고 있다. 우리의 포지셔닝 전략을 확실하게 세워야 한다.
-정부가 농업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하겠다고 했는데.
△전략적 선택으로 바람직하다. 미국의 예봉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기도 하지만 더 이상 개도국 지위를 유지할 명분이 없다. 싱가포르가 그랬다. 개도국 지위 유지로 인한 실익도 그다지 크지 않다. 쌀은 남아돌고 재고비용도 늘어난다. 이제는 쌀 가격 지지정책을 농가소득 지지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 소득 지지정책은 WTO가 허용하는 보조금이다.
지난 6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 공식 환영식에서 의장국인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와 악수한 뒤 문재인 대통령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일관계 악화가 경제문제로 확산하고 있다.
△경제적 관점에서 본다면 미국의 중국 때리기와 엇비슷하다. 일본의 한국 견제인 것이다. 좀 더 좁힌다면 한국 반도체 죽이기다. 메모리 분야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비메모리까지 한국이 따라잡을 듯하니 부담스럽고 싫은 것이다. 다만 한일 경제전쟁이 장기화하면 아무래도 우리가 불리하다. 화이트리스트를 살펴보면 비대칭적이다. 일본이 필요한 것도 있겠지만 우리가 필요한 게 더 많다.
-청와대 참모가 우리 경제구조를 ‘가마우지’에 비유했다는데.
△소부장(소재·부품·장비)의 일본 의존도가 높아 우리 수출이 늘면 일본이 이득을 본다는 의미인데 우리 경제가 그렇게 허접한지 의문이다. 우리 경제가 수입유발형 수출구조지만 수십년간의 국산화 노력에 따른 성과도 상당하다. 핵심전략의 소재·부품은 자립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소재·부품의 100% 자립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글로벌 분업체계에서는 경쟁우위의 제품이라면 수입해서 쓰는 게 나을 수 있다. 물론 대체수입선이 확보된다는 전제하에서다.
-한일갈등의 해법으로 미국 중재론이 거론되는데.
△미국이 이야기하면 일본은 대체로 듣는 편이다. 중요한 것은 미국이 우리 입장을 반영해 일본에 모종의 압력을 넣는다면 공짜가 없다는 점이다. 이런 비용은 우리가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미국이 중재 역할을 하지 않으면 한일 타협점을 찾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한국과 일본 어느 쪽도 머리를 먼저 숙이기 어려운 상황이다. 양국 모두 타격을 본격화하기 전에 외교해법으로 풀어야 한다. /권구찬선임기자 chans@sedaily.com
He is…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UCLA에서 경제학 석박사를 받았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을 거쳐 1993년부터 숙명여대 경제학부에서 통상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유엔개발계획(UNDP)과 아시아개발은행(ADB)에서 컨설턴트로 근무한 경험이 있고 2015년부터 2년 동안 현대경제연구원 원장을 지냈다. 올해부터 한국국제통상학회 제24대 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