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 1945년 美해병 중국 진입

상처만 남긴 판단착오

1945년 중국 칭다오에 상륙한 미국 해병들. /위키피디아

1945년 9월30일 오전10시30분 중국 톈진시 하이허 하구. 미국 해군 수송함에서 해병 제3상륙군단 소속 1해병사단이 쏟아져 나왔다. 미 해병대는 이튿날까지 주요 지역에 대한 전개를 마쳤다. 일부 지역에서는 국민당군의 장교들과 관리들이 미군을 영접하고 주둔이 필요한 지역을 알려줬다. 산둥성에도 미 해병 6사단 병력이 들어갔다. 10월 중순까지 중국 전개를 마친 미군 병력은 5만여명에 이르렀다. 해병 2개 사단에 7함대와 14공군의 일부, 제1 해병 비행단, 2개 해군 건설대대에 특수임무대(UDT)까지 포함한 미 해병 원정단은 당초 일본 본토로 진격할 예정이었지만 원자폭탄 두 방을 맞은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무너지자 괌과 오키나와에서 대기하던 중 중국행 수송함으로 옮겨탔다.


미국은 왜 태평양전쟁이 끝나자마자 동맹국이던 중국에 해병대를 보냈을까. 두 가지 목적에서다. 쾌속 전진하는 소련을 견제하고 중국 내 일본군 무장해제와 정국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다. 미국이 애써 마련한 협상 테이블에서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서로를 속였다. 미국이 겉으로만 중재를 내세울 뿐 국민당군 편을 들고 있다고 생각한 홍군은 미 해병대와 직접 전투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1946년부터 규모를 줄인 중국 주둔 미군은 1949년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홍군과의 전투에서 35명이 죽고 43명이 다쳤다.

미국은 사람뿐 아니라 돈과 물자도 국민당군에 쏟아부었다. 1937~1948년 동안 미국이 중국에 지원한 무상원조와 차관 제공의 60%가 태평양전쟁 이후다. 미국의 지원에도 국민당군이 무너진 이유는 부패 탓. 미군은 1946년에 이미 국민당군에 회의적인 판단을 내렸다. 국민당군에 밀리던 중공은 한때 신의주 코앞 단둥시까지 내줬으나 북한의 대대적인 지원으로 가까스로 전세를 돌렸다. 국민당 정권의 붕괴는 동아시아의 운명도 갈랐다. 역내 제1 파트너로 중국을 염두에 두던 미국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농어촌 위주의 낙농국가로 일본을 변모시켜 병기 생산능력을 지우려던 미국의 계획도 완전히 빗나갔다.

전범 국가 일본은 오히려 지역 맹주로 다시 태어났다. 일본은 미국의 판단 착오와 한국 젊은이들이 동란에서 흘린 피와 땀으로 반사이익을 고스란히 누리며 성장 가도를 달렸다. 미국은 1972년 상하이 공동성명에서야 중국을 통해 소련을 견제하겠다는 오랜 목표를 현실로 이뤘다. 요즘 미국은 예전처럼 판단을 잘못 내리는 경우가 없을까. 걱정된다. 고집불통에 일방통행이.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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