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택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1일 발표한 9월 소비자 물가상승률이 지난해 대비 -0.4%를 기록했다. 물가 통계를 작성한 후 최초의 마이너스 숫자인데, 정부에서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곧 회복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런데 국내 생산활동 전체를 포괄하는 물가지표인 국내총생산(GDP) 디플레이터는 올해 상반기 평균이 -0.6%다. 이는 기업 간에 사고파는 물건을 포함한 국가 경제 전체의 재화와 서비스 가격이 이미 연초부터 내려갔다는 의미로, 남은 기간의 추이에 따라서는 2019년 GDP 디플레이터가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다.
장바구니 물가 때문에 걱정이 많은 주부들로서는 물가가 내려가는 상황을 두 손 들고 반길지 모른다. 서울이 물가가 비싼 도시로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상황이니 물가가 내려가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길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경제활동의 중요한 지표인 가격이 전반적으로 내려가는 상황, 즉 디플레이션을 맞게 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기업은 기계·원료·부품을 사고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해 제품을 만드는데, 생산에 드는 비용 즉 원가 이상으로 제품을 팔아야 이윤을 남길 수 있다. 시장가격과 원가를 비교해 제품을 생산하는데, 만약 원가를 다 들여 만든 제품을 출시할 때 시장가격이 내려가면 낭패다.
반면 소비자는 물가가 내려가는 추세일 경우 되도록 구매를 늦추려 할 것이며, 돈의 가치가 높아지므로 소비하기보다 은행에 저축하는 것을 선호한다. 제품가격 하락으로 어려워진 기업의 매출을 더욱 감소시키는 악순환을 초래하는 것이다. 디플레이션에서는 나라 살림을 꾸려나가기도 힘들다. 국가 예산을 짤 때 기업이 물건을 팔아 벌 돈이나 개인의 소득을 예측해 세수를 잡는데, 물가가 내려가면 원래 계획만큼 걷힐 수 없다.
실제 디플레이션으로 피해를 많이 본 나라는 일본으로, 지난 20여년간 열네 번의 마이너스 물가를 겪었으며 이 시기를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부를 정도다.
26일자 칼럼에서 1%대 성장이 유례없는 일이라고 언급했지만 시장 경제의 신호라고 할 수 있는 가격이 작동하지 못하는 디플레이션을 맞는다면, 그야말로 한국이 가보지 못한 길로 들어서게 된다. 한국은 노인인구 증가처럼 일본과 유사한 점도 있지만 소비와 저축의 패턴 등 차이점도 크다. 그렇다고 방심해서는 안 된다. 일본은 동아시아 외환위기 이후인 1999년부터 7년 연속, 글로벌 금융위기인 2009년부터 5년 연속 장기간 디플레이션을 겪었는데 이는 외부의 충격이 영향을 줬다는 의미로, 우리도 미중 무역전쟁 확대 같은 시나리오에 대비해야 한다.
디플레이션을 막기 위한 기본적인 대책은 통화 팽창이지만 그저 한국은행에서 돈을 푸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돈이 기업의 생산활동과 소비자의 구매활동을 통해 쓰이도록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그런데 기업활동의 중요한 지표인 투자는 최근 5분기 동안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기업이 현금이 쌓여도 투자하지 않고 국내보다 해외 공장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소비자도 한국 경제의 장래에 대한 염려가 덜어져야 현재의 지출을 늘릴 것이다. 따라서 경제에 대한 불안심리를 줄일 수 있도록 기업 투자환경 개선, 규제 축소, 노동시장의 유연성 제고를 위해 정부가 노력해야 한다.
재정의 역할과 관련해 먼저 불황이므로 재정지출을 늘릴수록 좋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일본이 디플레이션을 겪던 해에 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이 다른 연도보다 높았다. 정부가 경제상황을 고려해 내년 예산안의 국세 수입을 올해에 못 미치는 292조원, 총수입은 482조원으로 잡았지만 유례없이 낮은 명목성장률을 고려하면 만만한 수준은 아니다. 세금 때문에 민간의 경제 심리를 더욱 위축시키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