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 벽에 부딪힌 전통적 통화정책…'폴리시믹스'로 생산성 깨워라

<금리 인하, 경기부양 효과 있을까>
글로벌 저금리 기조 뚜렷…경기둔화 늦추는 보험성격 강해
돈 풀어도 돌지 않는 '유동성 함정'에 소비·투자 늘지 않아
규제완화·부실기업 구조조정 동반돼야 경제체질 개선 가능
일각선 "韓 디플레초입" 분석…장기불황 日 반면교사 삼아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 7월18일 서울 중구 한은에서 금융통화위원회를 주재하고 있다. 한은은 이날 기준금리를 1.75%에서 1.50%로 0.25%포인트 인하했다. /이호재기자

2016년 1월29일. 일본은행(BOJ)이 통화정책회의를 열고 전격적으로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했다. 아베노믹스를 강력하게 실행했지만 엔화 강세와 수출부진 등으로 경제가 다시 삐거덕거리자 경기부양을 위해 단기 정책금리를 -0.1%로 내린 것이다. 마이너스 금리는 아시아 국가 중 일본이 처음이다. 전 세계적으로는 덴마크, 유럽중앙은행(ECB), 스웨덴, 스위스에 이어 다섯 번째였다. 일본은 지금까지 -0.1% 정책금리를 유지하고 있다.

당시 일본이 마이너스 정책금리 카드까지 꺼낸 것은 그만큼 경기부양 의지가 컸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낮추면 돈이 돌고 소비와 투자가 늘어나면서 경기도 살아난다는 게 경제학의 일반적인 상식이다. 하지만 현실은 기대와는 다르게 흘러갔다. 기업은 투자를 늘리지 않았고 가계는 소비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늘어난 것이 금고(金庫) 소비였다고 한다. 마이너스 금리에 은행에서 돈을 찾아 금고에 넣어두려 했기 때문이다. 외환시장과 주식시장도 거꾸로 반응했다. 금리를 내리면 환율이 올라야 하지만 엔화강세(엔·달러 환율하락)가 이어졌다. 마이너스 금리에 갈 곳 없는 자금이 증시로 몰릴 것으로 기대했지만 주가는 오히려 급락했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엔화강세로 수출에 차질이 생기면 기업실적이 나빠질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글로벌 금리 인하 도미노가 이어지고 있다. 경기둔화 우려가 커지면서 각국 중앙은행들이 잇따라 돈을 풀고 있는 것이다. 지난 7월 금리를 깜짝 인하했던 한국은행 역시 조만간 추가 금리 인하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시장에서는 이달 17일 금융통화위원회 정례회의나 늦어도 오는 11월 금통위 또는 내년 초 회의에서 금리 인하를 예상하는 분위기다.

중앙은행의 기준금리 정책은 시중금리·주가·환율 등에 두루 영향을 미친다. 기준금리를 내리거나 올릴 때는 항상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공존하기 때문에 양날의 칼로 불린다. 한은이 금리정책에 신중을 기하는 이유다. 한은이 지금 금리를 내리려는 것은 경기부양보다는 경기둔화를 늦추기 위한 보험적 성격이 강하다. 이런 정책 목표가 실현되지 않는다면 실기론이 불거질 수밖에 없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금리 인하가 경기부양에 효과가 있는지에 대해 이견이 존재한다.


◇불황에 금리 인하 도미노=금융권에 따르면 올 3·4분기 중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기준금리를 내린 사례는 16개국 24차례에 이른다. 상반기 동안 8개국에서 9차례 내렸던 것에 비하면 단기간 금리 인하 국가도, 횟수도 크게 늘어난 것이다. 그만큼 경기를 좋지 않게 보는 나라가 늘고 있다는 얘기다. 특히 9월에는 세계 3대 경제권인 미국, 중국,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이 모두 금리를 내렸다. 유로존의 경우 2016년 3월 이후 무려 3년 6개월 만의 금리 인하였다. 2014년 6월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한 유로존은 이번 인하로 금리가 -0.4%에서 -0.5%가 됐다.

한국 역시 대내외 변수에 따른 경기 부진이 계속되고 있어 정부는 물론 통화 당국도 무엇이든 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최근 출입기자단 워크숍에서 “경기 하방 리스크가 커지고 있어 올해 2.2% 성장률 달성도 녹록지 않다”며 “통화정책을 완화적으로 운영하겠다는 기조에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금융시장에서는 한은이 현재 1.50%인 기준금리를 조만간 0.25%포인트 낮출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0.25%포인트 인하로는 경기 부진에 대응하기 충분하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선진국들이 기준금리를 낮출 만큼 낮춘 만큼 한은이 0.25%포인트를 내려봤자 뒤쫓아가는 형국에 불과해 정책 효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다.

김성태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전망실장은 “금리를 내리면 (금리를 내린 나라와) 같은 수준이 되는 것이고 내리지 않으면 우리만 높아지는 것이라 정책 효과가 제한적”이라고 말했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 센터장도 “효과가 없지는 않겠지만 과거보다 금리의 절대적인 수준이 낮아진 상태라 기대감이 크지 않다”고 말했다. 한은이 금리 인하 여부를 놓고 딜레마에 빠져 있는 형국이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 7월18일 한은 기자실에서 금융통화위원회의 금리인하 결정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연합뉴스

◇약발 떨어진 금리 인하의 정책 효과=중앙은행의 기준금리 결정은 돈의 흐름과 돈의 양을 결정하는 전통적인 통화정책의 핵심 수단이다. 중앙은행은 기준금리 인하 또는 인상을 통해 위축된 경제를 살리기도 하고 과열된 경제에서 거품을 빼기도 한다. 기준금리 인하→콜금리 인하→예금·대출금리 인하→장기 시중금리 인하 등이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돈의 가치(환율)가 떨어지는 만큼 기업과 가계의 이자 부담이 줄고 수출에도 도움을 준다.

금리 인하 효과는 경제상황이나 다른 정책과의 조합에 따라 효과가 그때그때 다를 수밖에 없다. 한은에서는 보통 기준금리 0.25%포인트를 인하하면 국내총생산(GDP)에 0.05%포인트 정도 보탬이 되는 것으로 분석한다. 그러나 금리 인하 효과가 과거보다 제한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우선 한은이 금리 인하를 통해 시중에 자금을 풀어도 돈이 돌지 않고 고여 있는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이른바 유동성의 함정이다. 가계는 부채만 1,500조원에 이르는데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선뜻 소비를 늘리지 못하고 있다. 기업이 투자를 미루는 것도 자금이 없다기보다는 정책 불확실성 때문이다.

자금시장에 돈이 돌지 않는 유동성 함정에 빠져 있다는 사실은 통화량이 사상 최대지만 통화승수가 사상 최저라는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한은에 따르면 현금과 현금성 자산을 의미하는 부동자금은 6월 말 현재 983조3,875억원으로 사상 최대치다. 그러나 돈이 얼마나 잘 도는지를 나타내는 통화승수는 올 1·4분기와 2·4분기 모두 15.7을 기록하며 역대 최저치로 떨어졌다. 연간 명목 GDP를 시중통화량으로 나눈 통화유통 속도도 지난해 0.72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기준금리를 내려도 기대물가가 낮아지면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한은 금융통화위원을 지낸 함준호 연세대 교수는 최근 세미나에서 “명목금리를 제로금리 수준으로 낮춘다고 해도 기대 인플레이션율 하락으로 실질금리가 높아지는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통화정책의 유효성이 상실될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재정·통화 정책조합으로 생산성 있는 곳에 돈 보내야=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리 인하 같은 전통적인 통화정책은 이미 벽에 부딪혔다는 게 대체적인 의견이다.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각국 중앙은행들은 금융시장에 유동성을 직접 공급하는 ‘양적 완화’ 카드를 꺼냈다. 이미 기준금리가 제로금리에 근접한 상황에서 쓸 수 있는 유동성 공급 카드는 직접 채권을 매입하거나 금리를 마이너스로 내리는 비전통적 통화수단뿐이라는 분석이다. 그러나 이 역시 최근의 글로벌 경기 부진 상황을 보면 중장기적인 효과를 보기 어렵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한국 역시 기준금리가 이미 사상 최저치로 떨어진 상태고 금리 인하로 인한 긍정론과 부정론이 혼재하기 때문에 추가 금리 인하 여력 역시 제한적이다. 설사 기준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낮춘다고 해도 기업이나 가계의 경제 심리가 좋아진다는 보장도 없다. 그렇다고 선진국처럼 양적 완화 정책 카드를 꺼내기에는 제한 요건이 많다. 정민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금리정책은 통상 1년 정도 시차를 두고 경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당장 가시적인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며 “금리 인하에 경기부양 기대 효과만큼 잠재적인 위험도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더구나 한국 경제는 구조적인 저성장 상황으로 가고 있다. 잠재성장률은 내년에 1%대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되는 등 기조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가계가 소비를 자제하고 기업이 투자를 늘리지 않으면 경제성장은 물론 인플레이션 발생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경기가 가라앉고 있는데 손을 놓고만 있을 수는 없다. 현실적인 대안은 없을까.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대안은 재정과 통화의 폴리시믹스(Policy Mix·정책조합)다. 여기다 저출산 고령화에 대한 대비와 구조조정이 반드시 병행돼야 경제 체질이 개선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김학균 센터장은 “재정을 쓰더라도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곳에 사용해야 한다”며 “고령화에 대한 대비와 부실기업 구조조정이 동반되지 않으면 생산성은 결코 높아질 수 없다”고 지적했다.

민간에 활력을 주는 규제 완화도 폴리시믹스를 뒷받침할 대표적인 수단으로 꼽혔다. 김성태 경제전망실장은 “가계·기업·정부 중 기업이 제일 좋지 않다”며 “규제 완화를 통해 기업들이 막혀 있는 부분만 숨통을 터줘도 투자와 일자리가 자연스럽게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9월 소비자물가가 -0.4%를 기록하면서 공식 소비자물가가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9월 수출은 -11.7% 줄어 지난해 12월 이후 10개월 연속 마이너스다. 지난해부터 생산연령인구(15~64세)까지 감소하고 있다. 정부와 한은은 인정하지 않지만 전문가들은 디플레이션 초입에 들어섰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한국 경제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 우물쭈물하다가는 1990년대 중반 이후 20년간 장기불황을 겪은 일본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우리보다 먼저 장기불황을 겪은 일본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 적극 대응해야 할 때다. /김정곤 논설위원 mckid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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