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백남준을 만나다]전 세계 누빈 천재예술가...마지막 길까지 한편의 퍼포먼스

<29>백남준, 별이 지다
뇌졸중으로 쓰러진후 체력 약해졌지만
새로운 작품·전시 계획 등 멈추지 않아
따뜻한 마이애미서 부인과 겨울 보내다
2006년 음력설날 10년 투병 끝 별세
조카 하쿠다, 장례식장서 퍼포먼스 제안
참석자들 넥타이 잘라 고인 몸에 수북이
별 되어 떠나던 날도 '백남준스럽게' 끝나

백남준의 장조카인 켄 백 하쿠다(맨 왼쪽)이 2006년 2월 3일 뉴욕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하던 중 백남준의 유명한 퍼포먼스인 넥타이 자르기를 제안하고 있다. 백남준의 부인이자 미디어아티스트인 구보다 시게코(맨 오른쪽)가 지팡이를 짚고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사진제공=윤정미

백남준은 땀을 많이 흘리는 편이기도 했지만 추위에 더 취약했다. 특히 배가 차면 맥을 못 췄다. 그래서 배를 감싸는 복대를 두르곤 했다. 기록으로 남아 전하는 백남준의 전시 준비 사진에서는 복대 맨 그의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출장길에 복대를 챙기지 못했을 때는 신문지로 배를 감싸기도 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진 백남준은 혹독한 뉴욕의 겨울을 견딜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종종 따뜻한 플로리다주의 마이애미에서 겨울을 나곤 했다. 지난 1984년 마이애미 공항 확장 프로젝트에 참여한 그가 비디오작품 설치에 대한 답례로 3만 5,000달러를 받았는데, 그 돈으로 사 둔 현지의 작은 아파트가 있었다. 주치의도 따뜻한 곳이 좋겠다며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 있는 마운트 시나이병원을 소개해 줬다. 매년 혼자 가던 마이애미에서의 겨울나기에 아내 구보다 시게코가 동행한 것은 쓰러지던 1996년 그 해 겨울이 처음이었다.

마이애미에서의 백남준은 매일 아침 8시면 동네 카페로 나가 주변 사람들을 구경했고 많이 웃었다. 평소에는 “가장 따분한 일이 TV보는 것”이라고 했지만 거동이 불편하니 TV를 보며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이영애가 주연한 한국 드라마 ‘대장금’을 즐겨 봤고, 현대극을 보면서는 서울의 익숙한 풍경에 반가워했다. 몸은 부자유스러웠지만 작품 생각, 전시 계획은 멈추지 않았다. 백남준의 오래된 바람은 상하이에서의 전시였다. 미술평론가 이용우와 뉴욕에 살던 김양수 두손갤러리 대표가 ‘꿈같은’ 상하이 전시를 기획하고 싶다는 소식을 전했다. 상하이의 발전소를 개조한 미술관인데 의논 좀 하고 싶다고 했더니 “마이애미로 기획안 들고 오라”고 했다. 기대에 찬 만남이 성사됐지만 구보다 여사가 아무런 설명 없이 “노, 노(안 돼)”를 외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백남준은 무력했다.

“난 하고 싶지만 안 되겠다. 만드느라 고생했는데 미안하다. 지금 내 몸이 이러니 시게코가 안된다고 하면 안되는거다. 미안하다.”

구보다는 자신도 미디어아티스트로 성공하고자 하는 열망이 컸고 백남준 혼자서만 승승장구하는 것에 대한 질투도 없지 않았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전언이다. 어쩌면 구보다를 포함시킨 전시였다면 “예스”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렇게 상하이 전시는 물거품이 됐다.

2005년 연말이 되자 어김없이 백남준 부부는 짐을 싸 마이애미로 향했다. 그 곳에서 새해를 맞았다. 1월 29일은 음력으로 정월 초하루, 즉 설날이었다. 구보다는 백남준이 좋아하는 장어덮밥을 해 주기로 하고, 시장에서 싱싱한 장어를 사 왔다. 오후 6시 무렵 이른 저녁을 먹으며 백남준은 “맛있어, 맛있어”를 연발했다.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구보다가 침실에서의 가쁜 숨소리를 들은 것은 두 시간쯤 지나서였다. 깜짝 놀라 구급차를 불렀다.

2006년2월3일 뉴욕에서 열린 백남준의 장례식 초대장. /사진제공=윤정미

그 무렵 박영덕 박영덕화랑 대표는 이탈리아 볼로냐에 있었다. 매년 1월 하순에 열리는 볼로냐 아트페어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마침 출품한 백남준의 작품 중 하나를 이탈리아 자동차회사 피아트(FIAT)의 당시 사장이 사 갔다. 박 대표는 그날 일정이 끝난 후 숙소인 호텔에 들어갔다가 뉴스를 통해 백남준의 타계 소식을 접했다. 그냥 먹먹했다. 유족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터라 장례식에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박 대표는 백남준의 직접 지시로 작품을 받아오는 터였는데, 작가의 장조카인 켄 백 하쿠다가 이 부분을 문제 삼았고 더이상 함께 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국에 있던,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이던 정준모 역시 외신으로 백남준의 소식을 들었다. 사실이 알려지기 무섭게 기자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정 실장, 백남준 선생 댁으로 전화를 했는데 통화가 안 돼. 어찌 연결할 방법 없을까요?”


“뉴욕 맨해튼 집으로 전화했어요? 추워서 마이애미에 가셨을텐데.”

정준모는 각기 다른 기자들에게 같은 말을 반복해야겠다. 돌아오는 대답도 똑같았다. “그럼 마이애미 집 전화번호 좀 알려줘요.”

하필이면 해가 바뀌어 작년에 쓰던, 그러니까 마이애미의 백남준 아파트 전화번호를 적어둔 수첩이 수중에 없었다. “전화번호 좀 알아보고 연락 드리죠”라고 끊고는 박영덕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난히 낮고 축 처진 목소리로 박영덕이 전화번호를 불러줬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전화한 적 없는 번호였음에도 그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정준모가 마이애미의 백남준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숨이 턱에 찬 듯 헉헉거리며 백남준의 아내 구보다 시게코가 전화를 받았다.

“남준이 떠났어요. 지금은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갔는데, 내가 챙겨갈 게 있어서 집에 들렀어요. 다시 나가야 해요.”

짧은 통화는 거장의 타계 소식 만큼이나 황망하게 끝났다. 정준모는 기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백남준의 집 전화번호와 자신의 통화 내용을 공유했다. 그와 동시에 국내 언론을 통해서도 백남준의 별세 소식이 알려졌다.

2006년 2월3일 뉴욕에서 열린 백남준의 장례식에서 친구 오노요코가 추도사를 읽고 있다. /사진제공=윤정미

백남준과 20년 가까이 함께 작업한 이정성도, 뉴스를 통해 건너건너 소식을 들었다. 이정성 역시 백남준의 부인 구보다, 조카 하쿠다 등이 한국사람을 경계한다는 느낌을 받은 뒤로 연락을 잘 않던 때였다. 구보다는 백남준의 안부를 묻고자 전화를 하면 전화기 너머로 인기척이 뻔히 들리는데도 “잔다” “운동 나갔다” 등의 핑계를 대며 전화를 피했고, 어쩌다 통화가 될라치면 백남준이 “저 년이 나를 때린다. 나 좀 데려가라”고 말하는 게 마음 아파 어느 순간부터인가 전화를 하지 않게 됐다. 백남준이 떠났다는 얘기에 이정성은 하루 반나절을 멍하게 있었다. 켄에게 메일을 보냈다. ‘내가 장례식에 참석하는 게 당연한 것 같다. 회신을 부탁한다.’ 장례식 하루 전날 답장이 왔다. 고인의 시신을 마이애미에서 뉴욕으로 옮겼고, 5일장으로 2월 3일 프랭크 E.캠벨 장례식장에서 영결식이 열린다는 내용이었다. 그 길로 뉴욕행 첫 비행기를 탔고, 장례식장에 1시쯤 도착했다. 하쿠다가 가족석 바로 뒤, 즉 가족이 아닌 사람 중에는 가장 가까운 자리에 이정성을 앉혔다. 그는 장례식 이후 뉴욕근현대미술관(MoMA)에서 이정성을 따로 만나기도 했다. 당시 한류 열풍에 가수 비가 뉴욕 공연을 할 때라 하쿠다가 먼저 K팝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고 “와줘서 고맙고 고생했다”면서 악수를 청하며 손에 쥐었던 300달러를 건네기도 했다.

관 속에 누운 백남준은 피아노 건반 문양의 검은 목도리를, 아내 구보다는 같은 문양의 하얀 목도리를 둘렀다. 3시로 예정된 장례식은 백남준의 친구이자 그의 영상작품에 자주 등장했던 현대무용가 머스 커닝햄이 휠체어를 타고 외출하는 일이 쉽지 않아 지연되는 바람에 조금 늦게 시작됐다. 한국인으로는 김홍희 전 서울시립미술관장, 복스럽게 생겼다고 하여 백남준이 ‘복부인 박명자 씨’라 부르던 박명자 갤러리현대 회장, 백남준아트센터 건립을 추진하고 있던 경기문화재단의 대표로 송태호 당시 대표이사 등이 참석했다. 그 때 문화재청장이던 유홍준은 고인과의 인연이 깊지는 않았으나 휴가를 내고 참석했다. 맨 처음 연단에 올라 추도사를 낭독한 이는 오노 요코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미망인이된 친구 구보다를 붙들고 잠시 눈물을 지었다. 나무,다리,섬까지 천으로 싸버리는 대지예술가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 부부도 참석했는데 크리스토는 “백남준이 빌려준 피아노를 싸버린 내 작업이 있었는데, 그걸 다 풀어버린 것을 아마도 가장 후회스런 일 중 하나로 꼽을 것”이라고 말해 침통한 좌중을 웃게 했다. 그 자체로 백남준과 크리스토라는 두 거장의 젊은 시절 협업작품이 됐으니 돈으로 따지자면 수백 만 달러가 됐을 것이라는 얘기도 곁들였다.

휠체어를 타고 백남준의 장례식을 방문한 전설적 현대무용가 머스 커닝햄. /사진제공=윤정미

백남준의 장조카 켄 백 하쿠다의 제안으로 장례식 참석자들은 백남준의 1960년 퍼포먼스를 재해석해 자신의 넥타이를 자르는 것으로 고인을 기렸다. 사진 왼쪽 아래에 고개 숙인 사람이 엔지니어 이정성이고, 뒤쪽으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도 보인다. /사진제공=윤정미

장례식을 이끌던 하쿠다 켄이 연단에 올라 넥타이 자르기 퍼포먼스를 제안했다. 백남준은 지난 1960년 10월 쾰른에서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구’라는 공연을 하면서 청중석에 있던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가위로 싹둑 자른 적 있다. 케이지는 백남준이 스승이라 부르던 현대음악가로, 권위의 상징인 넥타이를 자르는 행동은 기존 예술과의 단절, 새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예술의 시작을 선언하는 몸짓이었다. 하쿠다는 2004년 백남준의 마지막 퍼포먼스에 참여해 찢은 악보를 씹어먹고 삼촌의 붓질을 위해 자신의 머리를 내 준 적 있다. 그가 ‘넥타이 퍼포먼스’를 선언하자 장례식장 직원들이 가위를 들고와 나눠줬다. 여기저기서 탄성과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백남준이 별이 되어 떠나던 날은 ‘백남준스럽게’ 끝났다.

한국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다다익선’ 앞에 빈소가 마련됐다. 49재이던 3월 15일에 백남준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유골은 서울 삼성동 봉은사 법왕루에 모셔졌다. 유작인 ‘내 손’이 함께 놓였다. 전 세계를 무대로 전 지구를 웃고 울린 백남준은 그렇게 별이 되어 떠났고 작품 만이 남았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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